[설특집 ‘유물스타’ ②] 원조 아이돌 ‘소방차’·1세대 비보이 ‘현진영’…“그시절 10대들 ‘뿅’ 갔지”

입력 2020-01-23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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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한국 대중음악에 댄스를 기반으로 하는 퍼포먼스의 시대를 안겨준 스타들. 추억과 새로운 감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사진은 가수 김추자, 그룹 소방차, 현진영(왼쪽부터). 스포츠동아DB

196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한국 대중음악에 댄스를 기반으로 하는 퍼포먼스의 시대를 안겨준 스타들. 추억과 새로운 감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사진은 가수 김추자, 그룹 소방차, 현진영(왼쪽부터). 스포츠동아DB

■ 설 특집|‘유물스타’ 우리도 있다




1970년대 금기 깬 김추자·바니걸스
파격적 의상과 댄스로 도발적 이미지

1980년대 원조 아이돌 소방차 탄생
격렬한 퍼포먼스로 10대 감성 자극

1990년대 시대 앞서간 춤꾼 현진영
뉴 잭 스윙과 힙합 섞인 멜로디 전율





최근 새롭게 시선을 모으는 ‘탑골’의 스타들은 가창력과 함께 현란한 퍼포먼스와 무대매너를 과시한 이들이다. 짙은 감성을 담은 비교적 느린 템포의 노래와 무대보다는 경쾌한 멜로디와 리듬의 곡에 어우러지는 ‘볼거리’로서 퍼포먼스가 더 빨리 대중의 시선을 빨아들인다는 점에서 이들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보게 한다. 1950년대 이후 미8군 무대를 배경으로 형성되기 시작해 1960년대까지 가요계를 주도한 일군의 무리들로부터 힙합과 테크노 등을 거쳐 주로 10대들에게 소구해온 ‘아이돌 군무’에 이르기까지 절로 몸을 흔들게 하는 강렬한 리듬과 멜로디, 그에 얹히는 다채로운 가수들의 댄스 퍼포먼스야말로 시대를 읽는 또 다른 키워드가 된다.


● 김추자·남진·바니걸스 그리고 이은하…금기의 시대를 넘어 (1960년대 말∼1970년대)

1969년 신중현이 발굴한 김추자는 여전히 ‘한국 최고의 섹시가수’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표현과 창작의 자유로움이 날개를 펴지 못할 때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와 함께 무대에 나선 김추자는 굴곡진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의상과 흐느적거리면서도 현란한 무대매너로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육감적 감성의 보컬은 ‘획일적 반듯함’만을 강요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도발했다. 결국 ‘거짓말이야’ 등 적지 않은 노래와 무대가 금지 당했다.

그 대척점에서 남진은 여성 팬덤을 몰고 다녔고, ‘오빠부대’의 원조격으로 불린다. 유복한 집안 출신의 잘 생긴 외모, 세련되면서도 남성적인 목소리가 힘이었다. 트로트를 기반으로 이를 변주한 경쾌한 리듬에 다리를 흔들어대는 모습 그리고 실제로 그것 그대로 ‘벤치마킹’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의상 등은 퍼포먼스형 남성가수의 시대를 본격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정숙·재숙 쌍둥이 자매의 듀오 바니걸스(토끼소녀)는 1960년대 펄시스터즈의 뒤를 이어 ‘걸그룹’의 첫 머리에 등장할 만하다. 귀여운 외모와 뛰어난 화음으로 무대를 장악한 이들은 과감한 노출 의상으로도 시선을 모았다. 현란하거나 화려한 퍼포먼스보다는 리듬과 멜로디에 어울리는 살랑살랑한 몸놀림이 어우러지며 강한 개성을 구축했다.

1978년 노래 ‘밤차’는 새로운 퍼포먼스형 가수의 출발을 알렸다. 일명 ‘찌르기춤’으로 불리는 디스코풍의 리듬과 몸짓 때문이었다. 이은하. 1976년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과 ‘봄비’ 등 발라드와 솔 분위기의 보컬로 실력을 발휘했지만,지금까지도 그를 상징하는 건 역시 ‘밤차’와 디스코이다. 그의 무대는 일약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 희자매·소방차…퍼포먼스의 맹아 (1980년대)

1981년 서울 여의도광장(현 여의도공원)에서 ‘민족문화 계승과 젊음의 축제’를 표방한 대규모 관제 행사 ‘국풍81’이 열렸다. 1979 년 12·12쿠데타로부터 1980년 5월 광주를 짓밟고 권력을 잡은 신군부가 대학가의 저항을 무력화하려는 시도였다. 어쨌거나 많은 대학생들이 참여했고, 이는 이후 KBS 2TV ‘젊음의 행진’과 MBC ‘영11’이라는 무대로 이어졌다. ‘짝꿍’ 혹은 ‘영스타즈’ 등 코러스와 군무를 내세운 두 무대는 소방차 등 새로운 스타들을 탄생시켰다.

‘허슬’로부터 ‘브레이크댄스’ 등 1970년대 말 미국에서 유행한 흐름을 이어받은 당대 스타들은 비트에 몸을 싣는 자유분방한 춤으로 다가왔다. 소방차는 ‘텀블링’ 등 더욱 격렬하고 현란한 몸짓으로 무장해 10대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인기를 모았다.

이들이 남성 아이돌의 출발처럼 인식되고 있다면, 1978년 김재희·김효순·이영숙으로 출발해 인순이가 합류한 그룹 희자매는 늘씬한 여성그룹의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특히 인순이는 1983년 백댄서팀 ‘인순이와 리듬터치’를 통해 ‘밤이면 밤마다’로 이은하가 이끈 디스코 열풍을 이어갔다. ‘인순이와 리듬터치’에서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주노, R’ef의 박철우, 김완선 등이 활약한 사실은 댄스음악의 맹아가 된 시대였음을 확인시킨다.


● 그리고 현진영…만개한 댄스음악 시대 (1990 년대)

‘안개 빛∼ 조명은∼ 흐트러진 내 몸을 감싸고∼.’ 후드 티로 얼굴 전체를 가린 현진영이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호흡으로 노래한다. 여기에 서구의 뉴 잭 스윙과 힙합을 섞은 멜로디가 더해지면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1992년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통해 현진영이라는 이름 석 자와 ‘불멸의 명곡’이 만들어졌다. 그는 당시 활동했던 가수들과 비교해 날렵하지 않은 몸집과 키를 가졌지만, 외형적인 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포스가 강렬했다. 서울 이태원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춤꾼’으로 활동했던 그는 한국 ‘비보이 1세대’다. 박남정과 이주노의 후배로도 유명한 그는 1988년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에게 발탁돼 데뷔했고, ‘힙합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흥미로운 사실도 있다. 1990년 ‘현진영과 와와’의 이름으로 그와 함께 한 인물들 역시 힙합과 댄스 장르를 휘어잡은 가수들이다. ‘와와’ 1기는 클론의 구준엽과 강원래, 2기는 듀스의 김성재와 이현도이며 지누션의 션이 3기 출신이다. 현진영이 열어젖힌 댄스음악과 춤의 인기는 서태지와아이들이 ‘난 알아요’로 한층 더 끌어올리며 댄스 장르의 시대가 만개했음을 알렸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이정연 기자 annjo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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