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인터뷰만 600회 이상, 코피 쏟을 열정의 힘”

입력 2020-02-20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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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이 19일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영화 ‘기생충’ 기자회견에서 웃으며 인사말하고 있다. 주현희 기자 teth1147@donga.com

봉준호 감독이 19일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영화 ‘기생충’ 기자회견에서 웃으며 인사말하고 있다. 주현희 기자 teth1147@donga.com

■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 주역들이 짚어 본 아카데미상 수상, 그리고 그 후

“오스카 캠페인, 타인의 위대함 실감
기생충은 이런 영화, 정면돌파 이유
스코세이지 감독이 조금만 쉬래요
도전적인 영화, 산업이 더 껴안아야”

“칸 이후엔 봉 감독 얼굴만 주로 안아”
액션 자제한 송강호에 인터뷰장 폭소
이정은 “감독의 유머 봉하이브 원천”
한진원 작가 “박사장 집,내겐 판타지”

“1년 동안 일어난 많은 경사와 이벤트가 영화사적인 사건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지만, 저는 영화 그 자체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배우들과 촬영 스태프가 장인정신으로 한 장면씩 만들어낸, 그런 영화로요.”

세계영화사를 새로 쓴 봉준호 감독이 지금 품은 마음이다. 지난해 5월26일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시작으로 10일 제92회 아카데미상 작품상 등 4관왕까지 10개월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성과를 거둔 그는 19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분이 묘하다”며 입을 뗐다. 역사를 함께 쓴 배우 송강호는 “전 세계 관객에게 뛰어난 한국영화를 보일 수 있어 영광”이라며 “봉 감독의 수상 소감을 빗대자면 ‘가장 창의적인 것을 가장 대중적으로’ 만들기 위해 정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기생충’의 또 다른 주역인 제작자 곽신애 바른손 E&A 대표와 배우 이정은, 이선균, 조여정, 장혜진, 박명훈, 박소담을 비롯해 한진원 작가와 이하준 미술감독, 양진모 편집감독이 함께했다. 뜨거운 관심을 반영하듯 취재 신청자만 500여 명, 외신도 40여 개 매체가 참석했다.

제92회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관왕에 오른 영화 ‘기생충’을 향한 취재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연출자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과 주연배우들이 19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가운데 봉 감독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이 
대형화면을 통해 보이고 있다. 주현희 기자 teth1147@donga.com

제92회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관왕에 오른 영화 ‘기생충’을 향한 취재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연출자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과 주연배우들이 19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가운데 봉 감독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이 대형화면을 통해 보이고 있다. 주현희 기자 teth1147@donga.com


● “‘아카데미는 로컬’, 도발할 생각은…”

10개월의 숨 가쁘면서도 벅찬 과정을 돌아보는 자리인 만큼 이날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화제가 된 감독의 발언에 얽힌 뒷이야기부터 정치권의 과도한 관심에 대한 속내도 오갔다.

봉준호 감독은 지난해 미국 매체 인터뷰에서 “아카데미상은 로컬(지역) 시상식”이라고 언급해 크게 주목받았다. ‘도발을 위한 발언’이냐는 질문에 그는 “‘오스카 캠페인’도 처음 하는 와중에 무슨 도발까지 하겠느냐”며 크게 웃은 뒤 “칸이나 다른 영화제와 비교하며 나온 단어인데 미국 젊은이들이 트위터에 많이 올려 화제가 됐다”고 돌이켰다.

‘기생충’은 한국영화로는 처음 아카데미상을 겨냥해 지난해 8월부터 올해 2월까지 ‘오스카 캠페인’을 펼쳤다. ‘오스카 캠페인’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2월에 앞서 그 전 해 이르면 여름부터 수상을 겨냥해 각 영화사가 펼치는 적극적인 홍보 및 프로모션 활동을 말한다. 이는 한국영화계에 의미 있는 데이터베이스로 축적됐다. 봉 감독은 “인터뷰만 600회 이상, GV(관객과 대화)를 100회 이상 했다”며 “다른 경쟁작은 LA에 큰 광고판을 걸고 온라인 광고도 했지만, 우리는 북미 중소배급사인 네온과 CJ, 제작진이 똘똘 뭉쳐 물량공세에 열정으로 맞섰다”고 돌이켰다. “코피를 쏟을 정도였다”고도 말했다. 송강호는 “최고의 예술가들과 호흡하고 대화하는 (오스카 캠페인)과정은 내가 아닌 타인들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며 “6개월이 흐른 지금 내가 작아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프랑스 칸도, 미국과 영국의 아카데미상도, 전 세계 관객도, 왜 이토록 ‘기생충’에 열광할까. 분석과 해석은 넘치지만 이제 주역들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다.

봉준호 감독은 CNN 기자로부터 관련 질문을 받고 “도발적인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은 아니지만 영화를 할 때 스토리의 본질은 외면하기 싫다”고 운을 뗐다. 이어 “‘기생충’ 스토리가 우스꽝스럽고 코믹하고 빈부격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오는 씁쓸함도 있지만, 그걸 단 1cm라도 피하고 싶지 않았다”며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는 원래 이런 영화다’고 정면돌파하길 바랐다. 그래서 ‘당의정’을 입혀 달콤하게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오리지널 하우스키퍼’로 불리며 인기를 끈 이정은도 의견을 보탰다. “우리 뿐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이 겪는 경제적인 문제, 젊은이들의 실업난처럼 동시대 이슈를 굉장히 재미있고 흥미롭게 여러 인간군상으로 그렸다는 데에 열광한 것 같다”고 했다. 또 봉 감독의 팬덤을 지칭하는 ‘봉하이브’ 열풍에 대해서도 밝혔다. 이정은은 “오스카 캠페인을 벌이는 영화가 경쟁관계처럼 보여도 오랫동안 같은 동선을 밟으며 동지처럼 지낸다”며 “그 과정에서 봉 감독님은 언제나 유머를 잃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영화 ‘기생충’의 박소담,송강호와 봉준호 감독(왼쪽부터)이 19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반대편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있다. 주현희 기자

영화 ‘기생충’의 박소담,송강호와 봉준호 감독(왼쪽부터)이 19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반대편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있다. 주현희 기자


● “동상? 생가 복원? 이 또한 지나가리라”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직후 정치권에서는 이를 활용한 온갖 ‘공약’을 쏟아내 눈총을 받았다. 봉 감독은 웃음을 터트리면서 “기사들로 봤지만 동상, 생가라니…, 하하하! 그런 건 제가 죽은 뒤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고 있다”며 짧게 답했다.

대신 그는 이날 아침 이번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에 함께 후보로 올랐던 ‘아이리시맨’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앞서 시상식에서 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을 인용한 수상 소감으로 존경을 표했다. 봉 감독은 “그동안 수고했으니 이제 좀 쉬라고 (편지에)써 있었다”며 “쉬긴 쉬되 모두 차기작을 기다리니 조금만 쉬라는 얘기에 기뻤다”고 했다.

강행군 탓에 ‘번아웃’이 우려된다는 질문을 받고는 “이미 ‘옥자’를 끝냈을 때 번아웃 판정을 받았다”고 털어놓으면서 “‘기생충’이 너무 하고 싶어, 없는 기세를 영혼까지 긁어모아 찍었고, 촬영 기간보다 더 긴 ‘오스카 캠페인’도 소화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이내 머쓱한 표정으로 “내가 노동을 너무 많이 하는 사람인 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많은 시상식에서 ‘패러사이트!(Parasite·영어 제목)’ 호명을 들은 송강호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는 각종 수상 순간을 담은 영상을 다시 찾아보길 권하면서 “제가 늘 감독님 옆에 앉는데 작년 칸 황금종려상 때 과도하게 그를 껴안는 바람에 ‘감독님 갈비뼈에 실금 가겠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그 뒤로 자제하며 얼굴을 주로 안았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들은 아카데미상 4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어떻게 나눌까. 각본상(봉준호·한진원)과 작품상(봉준호·곽신애) 트로피에 각각 두 명의 이름이 새겨져 트로피는 수상자 인원대로 모두 6개다. 이름이 새겨진 트로피는 각자 챙겼다. 다만 국제장편영화상은 ‘트로피가 무거우니 제작사가 보관해 달라’는 봉 감독의 뜻에 따랐다.

‘장인정신’이라 일컬어지는 스태프의 성과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미국과 영국 아카데미 각본상을 공동수상한 한진원 작가는 “저는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기우(영화 속 최우식 캐릭터)의 환경과 가까웠기에 박사장(이선균)의 집은 내게도 판타지였다”며 “시나리오는 머리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시나리오 취재하면서 만난 수행기사님들, 가사도우미 분들의 도움으로 좋은 성적을 냈다”고 거듭 강조했다.

양진모 편집감독, 배우 송강호, 봉준호 감독, 한진원 작가, 이하준 미술감독, 배우 박명훈, 이정은, 조여정, 곽신애 대표, 배우 박소담, 장혜진, 이선균(뒷줄부터 시계방향)이 19일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영화 ‘기생충’ 기자회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주현희 기자 teth1147@donga.com

양진모 편집감독, 배우 송강호, 봉준호 감독, 한진원 작가, 이하준 미술감독, 배우 박명훈, 이정은, 조여정, 곽신애 대표, 배우 박소담, 장혜진, 이선균(뒷줄부터 시계방향)이 19일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영화 ‘기생충’ 기자회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주현희 기자 teth1147@donga.com


● ‘포스트 봉준호’…“도전과 모험 껴안아야”

1시간 동안 이어진 기자회견에서는 ‘기생충’의 성과가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나왔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창작을 지원하지 않으면 또 다른 봉준호, 새로운 ‘기생충’은 나오지 않는다는 위기론이다.

봉 감독은 “요즘 신인감독들이 ‘플란다스의 개’나 ‘기생충’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시나리오로 과연 투자를 받을 수 있을까” 묻고 “20여 년 동안 한국영화는 발전했지만 젊은 감독들의 이상한 작품, 모험적인 시도는 어려워진다”고 공감했다. 그러면서 “2000년대 초반에는 독립영화와 메인스트림의 다이내믹한 충돌이 있었지만 요즘은 평행선을 이룬다”고 진단하면서 “홍콩영화의 쇠퇴를 기억하듯, 한국영화가 비슷한 길을 걷지 않으려면 모험이나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적인 영화를 더 껴안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봉준호 감독은 26일 ‘기생충’의 흑백판을 내놓고, 동시에 미국 HBO를 통해 드라마 버전도 준비한다. 현재 두 편의 연출작도 구상하고 있다. 그는 “‘기생충’에 영향을 받기보다 평소 하던 대로 ‘정성스레 영화를 만들자’는 기조를 갖고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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