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베이스볼] 서용빈과 허문회가 걸었던 다른 길과 말의 무게

입력 2020-05-14 13: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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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빈 해설위원(왼쪽)-롯데 허문회 감독. 스포츠동아DB

LG 트윈스 팬들에게는 최고의 시즌인 1994년이다. 시즌을 앞둔 일본 오키나와 전지훈련 당시 LG는 일본프로야구 최다안타 기록 보유자인 재일동포 장훈을 인스트럭터로 초대했다. 그보다 1년 전 LG는 ‘미스터 LG’ 김상훈을 해태 타이거즈 한대화와 맞바꿨다. 이 때 1994년 신인지명권도 한 장 넘겨받았다. LG의 뜻에 따라 해태가 지명해 넘겨준 2차 1순위 신인이 허문회였다. 경성대 출신으로 타격에 자질이 있다는 평가였다.

1994년 LG 스프링캠프의 화제는 무주공산이 된 1루의 주인이었다. 코칭스태프는 장훈에게 선수들을 평가해달라고 했다. 장훈은 기대주였던 허문회의 타격을 본 뒤 “프로에선 성공하기 힘든 스윙”이라고 지적했다. 모든 선수들이 타격의 대가 앞에서 기량을 테스트 받을 때였다. 멀찌감치 있던 선수가 튀어나왔다. “저도 한 번 봐주십시오.” 1994년 2차 지명 6번째 선수, 전체 41번째 신인 서용빈이었다. 단국대를 졸업하고 캠프에 참가했지만 누구도 큰 관심을 주지 않던 선수를 장훈은 용기를 높이 샀는지 “흠잡을 데 없는 스윙”이라며 칭찬했다.

그 한마디가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 ‘피그말리온 효과’ 덕분인지 자신의 스윙에 확신을 품은 서용빈은 1루수 주전으로 도약했다. 김재현~유지현과 함께 1994년 신인 3총사 스토리를 만들며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앞장섰다. 중요한 순간마다 인상적 활약을 펼친 서용빈은 그해 1루수 골든글러브까지 받았다. 잘 생긴 그가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골든글러브를 받은 뒤 “이 자리에 오기까지 너무 힘들었습니다”라고 했던 말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모든 이들이 서용빈만 바라볼 뿐 주전경쟁에서 밀린 허문회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제 포지션이 없어 선수로서 큰 빛을 보지 못했던 허문회는 2001년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됐다가 2003년 LG로 돌아왔지만 변변한 세리머니도 없이 은퇴했다. 2006년을 끝으로 멋진 은퇴식과 함께 퇴장한 서용빈과 비교하면 초라했다.

그랬던 롯데 허문회 감독이 얼마 전 뜻밖에도 26년 전의 일을 꺼냈다. ‘왜 자신이 특정선수의 기량에 대한 평가를 꺼리는지’를 설명하면서였다. 정말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뒀던 얘기였을 것이다. 1994년 오키나와에서 “그런 스윙으로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은 뒤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그래서 “선수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말을 조심한다”고 털어놓았다. 왜 요즘 그가 비주전 선수들로부터 “나를 존중하는 느낌이 든다”는 말을 듣는지, 덕아웃 분위기가 종전과 왜 달라졌는지 짐작이 간다.

되돌아보면 서용빈이 빛나는 길을 걸어갈 때 그늘에서 상처받는 허문회가 있었는데, 기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그를 격려하거나 속내를 들어보지 않고 빛만 바라봤다. 그래서 새삼 허 감독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칼로 베인 상처보다 말이 주는 상처가 더 오래간다’고 한다. 지금도 혹시 주변의 말로 상처받거나 주위의 외면으로 가슴이 아픈 제2의 허문회가 더 있을지 모르겠다.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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