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발리볼] 체력, 멘탈, 소통, 평등! KB손해보험과 이상열 감독이 걷는 새로운 길

입력 2020-06-04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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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열 KB손해보험 감독. 스포츠동아DB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그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강스파이크를 날릴 때 팬들은 열광했다. 은퇴 후 지도자의 문도 활짝 열렸다.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에서 코치를 지냈다. 하지만 2009년 그 사건 이후 배구인생은 내리막을 탔다. 하루아침에 비주류로 밀려났다. 그의 이름과 그 사건은 영원히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숙명이다.

프로팀에서 몇 차례 감독 제의도 왔다. 결국에는 빈손이었다. 이 땅에선 더 이상 기회가 없을까봐 인도네시아로 떠나 지도자가 되려고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친정팀에서 찾았다. 11년 만에 먼 길을 돌고 돌아 온 감독직.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KB손해보험 이상열 감독(55)의 이야기다.

KB손해보험은 LIG손해보험 시절을 포함해 V리그 출범 이후 늘 우승권 밖에서 맴돌았다. V리그 초창기 2개 팀이 ‘봄 배구’를 할 때는 3등, 플레이오프(PO) 제도가 생긴 뒤로는 4위를 도맡았다. 2010~2011시즌 준PO 제도가 만들어진 덕에 4위로 딱 한 번 봄 배구를 경험했다. 최근에는 6위가 익숙한 KB손해보험은 해결사를 찾았다.

친정팀의 선택을 받은 이 감독은 팀의 현재 문제점을 ‘기량부족’이라고 진단했다. “그동안 보여준 배구가 우리의 실력이다. 다른 팀보다 기량이 부족하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해법을 묻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좋은 선수를 데려오는 투자 말고는 감독이 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다. 선수는 프로에 입단했을 때 기량이 정해진다. 프로에 와서 기량이 느는 것은 예외적 경우다. 새로운 기량을 익히도록 지도하면 넘친다.” 뚜렷한 선수보강이 없는 형편에서 그는 선수들과 함께 방법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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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이 감독과 나눈 대화에선 다양한 키워드가 나왔다. 가장 먼저 ‘체력’을 언급했다. “기량이 딸리면 체력이라도 좋아야 상대와 해볼 수 있다. 우리 팀은 항상 좋은 컨디션에서 상대와 경기를 해야 한다.” 그래서 요즘 가장 신경을 쓰고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선수 각자의 기량에 맞게 체력을 다지는 시간과 공을 갖고 훈련하는 시간을 배분해줬다. 예를 들어 베테랑 김학민은 공을 만지는 시간을 줄이는 대신 체력강화에 시간을 더 투자하게 했다. 또 KB손해보험 선수들은 요즘 주 2회 요가와 필라테스도 한다. 새로 추가된 훈련 메뉴다.

‘절제’와 ‘기 살리기’, ‘멘탈’도 언급했다. “프로선수라면 스스로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가장 힘든 것이 먹는 것이다. 최익제와 얼마 전에 내기를 했다. 내가 제안하는 대로 따라서 해보겠냐고 했다. 딱 3개월만 먹는 것을 줄여보라고 했다. 동료들에게 최익제의 절제를 응원하라고 했다. 성공하면 다른 선수들도 절제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고, 다른 시도도 할 것이다.”
그동안 부진한 성적 때문에 풀이 죽은 선수들의 기를 살려주려고 노력한다. 기량이 모자란 선수들에게는 강한 멘탈을 갖춰 실력의 격차를 메워보자고 당부했다.

물론 기량향상도 필요하다. 센터 김홍정과 구도헌은 일주일에 한 차례 야간훈련을 소화한다. 하루는 숙소에서 지내야 한다. 기혼자는 출퇴근을 하지만, 야간훈련이 필요한 선수들에게는 자발적 협조를 요청했다. 선수들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대신 최대한 선수들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훈련 외 시간에는 편히 지내도록 했다.

“선수들은 항상 스트레스 속에서 산다. 성적과 기량 등으로 가뜩이나 힘든 선수들에게 내가 뭐라고 말해서 더 스트레스를 줄 이유는 없다. 정해놓은 큰 틀 안에서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훈련 외의 시간에 일일이 관여할 필요는 없다.” 잔소리도 없다. 큰 잘못을 하더라도 단 한마디로 끝낸다.

이상열 KB손해보험 감독. 스포츠동아DB

‘소통’과 ‘평등’도 강조했다. 소통에 대한 해석이 독특했다. “감독이 일방적으로 얘기하고 선수가 듣기만 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상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소통이다.”

코트에서 뛰는 모든 선수는 동등하다고 봤다. 주전이라고 더 잘 대우해주고 비주전이라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다. “프로선수라면 나이, 경력에 관계없이 다 계급장을 떼고 붙는 관계다. 결국 실력으로 주전을 정하고, 이를 선수들이 납득하면 된다.”

최근까지 대학에서 선수들을 지도한 덕분에 요즘 젊은 세대의 생각을 다른 프로팀 감독들보다 잘 안다. 다른 무엇보다 공정성을 따지고, 자신이 하는 일의 정당성을 납득시켜주지 않으면 열의를 보이지 않는 선수들과 지냈기 때문이다. 말이 자발적으로 마부를 등에 태워 물가로 데려가는 그런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변화가 있다. KB손해보험은 최근 구단 사무실을 옮겼다. 선수들이 훈련하는 수원 인재니움 2층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이 감독은 지하 3층 훈련장에 가기 전후로 가끔 사무실에 들러 차도 마시고 직원들과 즐거운 농담도 주고받는다.

프런트를 중심으로 현장을 통제하려고만 했던 KB손해보험도 이제는 ‘동등한 관계’에서 과거와는 다른 시선으로 선수단을 대하려고 한다. 작지만 큰 변화가 될 수도 있다. 그동안 항상 이 부분에서 뭔가 아쉬움을 남겼던 KB손해보험은 이제 이 감독과 함께 새로운 길을 가려고 한다.

수원 |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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