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베이스볼] 월리 핍의 방심과 기회의 문을 연 선수들

입력 2020-06-09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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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움 전병우, SK 이흥련, 키움 조영건(왼쪽부터). 스포츠동아DB

월리 핍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메이저리그에 해박한 팬이 아니면 잘 모를 이름이지만, 연관된 이름과 스토리는 많다. ‘데드볼’ 시대의 홈런타자로 수비도 좋았던 1루수 핍은 1925년 6월 2일 야구역사에 영원히 남을 얘기를 만들었다. 당시 뉴욕 양키스의 주전이었던 그는 경기를 앞두고 밀러 허긴스 감독에게 두통을 호소했다. 허긴스 감독은 어쩔 수 없이 출전선수명단에 다른 젊은 선수의 이름을 적었다. 그가 루 게릭이다. 전날 대타로 출전했던 경기를 시작으로 게릭이 세운 위대한 ‘2130연속경기 출장’ 기록은 핍이 참을 수도 있었던 두통에서 시작됐다.

그 뒤로 핍은 두 번 다시 양키스의 1루를 맡지 못했다. 시즌 후 신시내티 레즈에 팔려갔다. 트레이드 머니는 7500달러였다. 이 극적인 스토리는 메이저리거들에게 ‘제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영원히 보장되는 자리는 없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자리는 꼭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요즘 갑자기 등장해 화제를 모으는 선수들이 많다. 6일 고척 LG 트윈스전 9회말 끝내기 안타를 친 키움 히어로스 전병우(28)가 대표적이다. 올 시즌 LG에 첫 블론세이브를 안겼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퓨처스리그(2군)가 활약무대였다. 외국인선수 테일러 모터가 조기 퇴출된 공백을 메우기 위해 1군으로 호출됐는데, 2~4일 대전 한화 이글스전부터 인상적 활약을 펼쳤다. 2015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 제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올해 키움으로 트레이드되면서 기회의 문이 열렸다. 손혁 키움 감독은 “얼굴만 봐도 좋은 선수”라고 말했다. 이런 신뢰가 쌓이면 KBO리그가 만든 게릭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최근 가장 뜨거운 선수인 SK 와이번스 포수 이흥련(31)도 이재원의 부상으로 뛸 자리를 얻었다. 두산 베어스에선 기회가 없었지만 트레이드로 유니폼을 바꿔 입자마자 연일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이제는 이재원이 긴장할 차례다. 되돌아보면 삼성 라이온즈 포수 강민호(35)도 롯데 시절 병역파동으로 주전 포수가 자리를 비운 사이 경험치를 쌓은 덕에 프리에이전트(FA) 계약 대박까지 터트릴 수 있었다.

야수뿐만이 아니다. 키움의 프로 2년차 조영건(21)은 3일 대전 한화전에 선발등판해 프로데뷔 첫 승을 신고했다. 부상당한 제이크 브리검의 대체선발로 마운드에 올라 감독의 눈도장을 받았다. 삼성 루키 허윤동(19)도 비슷하다. 외국인투수 벤 라이블리와 백정현의 부상 공백으로 인해 5월 28일 사직 롯데전에서 선발등판 기회를 얻어 KBO리그 역대 9번째 고졸 신인 데뷔전 승리투수의 기록을 세웠다. 그는 6월 3일 잠실 LG전에서도 승리투수가 돼 프로 데뷔 2경기에서 모두 승리한 역대 5번째 선수가 됐다. LG 이민호(19)도 비슷하다. 허리 수술을 받았던 정찬헌의 휴식을 위해 5월 21일 대구 삼성전 때 선발 데뷔전을 치렀는데, 대박이 났다. 2일 잠실 삼성전에선 패전투수가 됐지만, LG를 이끌 기대주임은 확신시켰다.

이처럼 누군가의 불행과 방심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행운이 된다. 스포츠세계에선 항상 벌어지는 일이고, 그 스토리에 팬들은 더 열광한다. 누구든지 제2의 월리 핍이나 루 게릭이 될 수 있다. 다만 행운은 열심히 준비해온 사람에게, 불행은 방심하거나 자만하는 사람에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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