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 피플] ‘노 피어’와 ‘챔피언십 컬처’ 서튼 롯데 2군 감독의 성공적 1년

입력 2020-10-13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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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파격이었다. 애초 1군 감독 후보군으로 외국인 3명을 공개한 뒤 면접을 진행하겠다고 밝힌 자체가 ‘사건’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을 퓨처스(2군) 팀 감독으로 선임했다. 독특한 결과가 가능했던 이유는 육성에 대한 비전을 충분히 교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래리 서튼(50)은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13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튼 감독은 2005년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고 한국과 연을 맺었다. 첫해 119경기에서 타율 0.292, 35홈런, 102타점을 올리며 홈런과 타점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KIA 타이거즈를 거쳐 3년간 246경기에 출장해 타율 0.280, 56홈런, 173타점을 기록한 채 한국에서 은퇴했다. 이후 미국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산하 마이너리그 타격 코디네이터 등을 역임했고, 올 시즌부터 롯데 2군 감독직을 맡았다. 서튼 감독은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출국한 당일인 8일 오전 스포츠동아와 만나 지난 1년을 돌아봤다.

서튼 감독이 소환한 10년 전 향수, ‘no fear’
- 선임부터 파격이었다. 1군 감독 면접을 본 뒤 2군 감독직을 수락했다.

“성민규 단장과 애리조나공항에서 면접을 봤다. 이 자리에서 ‘1군 감독’이라는 단어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4시간 동안 프로야구단이 추구해야 할 비전과 가치, 꿈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성 단장의 ‘챔피언십 컬처(우승 문화)를 만들고 싶다’는 말에 공감했고, 첨단장비를 통한 선수육성에도 흥미를 느꼈다. 이 때문에 면접 이후 2군 감독 제의가 왔을 때도 고민 없이 흔쾌히 수락했다. 태권도로 따지면 ‘흰 띠’를 매고 한국에 왔다. 다행히도 올 시즌 롯데 2군이 5할 승률을 기록했고, 여러 지표에서 상위권에 올랐다. 물론 이보다 큰 성과는 챔피언십 컬처 확립이다.”


- 챔피언십 컬처는 추상적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프로야구는 비즈니스다. 롯데, KIA, 삼성 등 대기업이 투자하는 돈은 20~3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기업은 선수나 팀이라는 상품에 투자하는 것이고, 당연히 수익을 기대한다. 그 기틀은 신뢰다. 가령 한 경기에서 좋은 타구 4개를 만든 선수가 있다고 가정하자. 타구가 불운하게 야수 정면으로 향했다면 결과는 4타수 무안타다. 이로 인해 선수의 기분과 태도가 나빠진다면 성장은 거기까지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다른 렌즈(two different lens)’로 이 기록을 살펴봐야 한다. 강한 타구를 생산했다는 성과를 인정하면 이 선수는 육성이 된다.”


- 그럼 육성의 정답은 ‘긍정적 마인드’인가?

“야구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은 누구일까? 훌륭한 코치? 첨단장비를 통한 분석? 아니다. 결국 실전이다. 경기 자체가 최고의 가르침이 돼야 한다. 실책을 한 선수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가 아닌, ‘어떤 의도로 그렇게 했니’라고 말하는 게 필요하다. 야구는 순간적 판단이 중요한 스포츠다. 스스로 생각하고 조정해야 성장할 수 있다. 코칭스태프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보다 이처럼 자기 확신을 심어주는 게 더 중요하다.”


- 10년 넘게 실책에 대한 질타만 받아온 선수단에게는 쉽지 않은 인식 변화다.


“선수단에게 1년 내내 강조한 게 ‘What we do? How we do? Why we do?(무엇을, 어떻게, 왜 할 것인가)’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실책이 나왔다면 결과가 나쁠 뿐 틀린 게 아니다. 이 차이를 깨닫는다면 선수들이 최고의 선생인 경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no fear(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의 철학·두려움을 없애라는 주문)’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KBO리그와 메이저리그의 생각 차이는 분명하지만 공통점도 있다. 한 명이 챔피언십 컬처를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수십 명의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싸울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게 육성이라고 생각한다.”


30대 중반의 쉼터? 미래를 논하는 ‘젊은 거인’
지난해까지 롯데 2군에는 30대 초중반 선수들이 즐비했다. 젊은 선수들의 성장보다는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베테랑의 공간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육성의 적체현상이 뚜렷했고, 이는 1군 선수단의 고령화로 이어졌다.

올해 롯데 2군은 전략적으로 20대 선수들 위주의 운영을 했다. 성장하는 투수들 같은 경우에는 투구수와 이닝을 명확히 제한했고, ‘코어’로 분류한 야수라면 나이에 관계없이 기회를 줬다. 그 결과 남부리그 OPS(출루율+장타율) 1위(0.733), 홈런 2위(41개), 도루 2위(113개) 등 성과까지 따라왔다.


- 롯데 2군에 가능성이 보이는 젊은 선수들이 많은 듯하다.

“2군은 1군에서 통할 선수를 만드는 게 핵심 목표다. 단, 부상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투수들의 이닝을 철저히 관리했다. 그러면서도 성장한 이들이 많다. 좋은 선수들이 정말 많지만, 그 중에서도 최하늘(상무 야구단)을 꼽고 싶다. 투수로서 정말 많이 성장했다. 향후 KBO리그 올스타 수준까지 자랄 것이다. 나균안도 극적 변화다. 포수에 대한 애착이 워낙 강했고, 또 좋은 포수였다. 이로 인해 본인이 투수로 성공할 수 있을 지에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선발투수로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덕에 시즌 마지막 3경기에서 16이닝 2실점을 기록할 수 있었다. 작은 성공이 쌓여 만든 결과다.”


- 야수 중에선 오윤석이 이미 1군에서 활약 중이다.


“히트 포 더 사이클 진기록을 다시 한 번 축하한다(웃음). 그 외에도 강로한, 김민수, 신용수, 최민재, 배성근 등 좋은 선수가 정말 많다. 냉정히 말해 이들은 단점도 분명하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다른 렌즈’로 보면 충분히 좋은 선수다. 최민재는 첫 두 달간 1할대 타자였지만 장점에 집중했다. 이들의 성장은 챔피언십 컬처의 기반이 됐다.”

ML급 첨단장비보다 중요한 이해와 신뢰
- 롯데 2군에는 랩소도, 블라스트 등 각종 첨단장비가 가득하다.

“장담컨대 ML 어떤 구단과 견줘도 밀리지 않을 수준이다. 문제는 장비가 아닌 결과다. 회전수, 수직 무브먼트 등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안다. 장비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지만, 무브먼트가 좋지 않은 선수를 향상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때문에 코칭스태프가 장비를 이해하는 게 핵심이다.”


- 코칭스태프의 역량이 더욱 중요할 것 같은데.

“선수는 쿠키가 아니다. 하나의 틀에 맞춰 찍어낼 수 없다. 개개인 맞춤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장비의 이해는 물론 선수 개인의 성향과 메커니즘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장비는 이를 돕는 과정이다. 선수가 1군에 통할 때까지 4년 정도 걸린다면, 반년 또는 1년이라도 줄일 수 있다.”


- 당신은 잠시 팀을 떠나지만 2군 선수단은 여전히 교육리그를 진행한다. 격려의 말을 부탁한다.

“세 가지의 말을 전하고 싶다. 우선 1군이 포스트시즌 경쟁에서 승리해 꼭 좋은 결과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 다음은 팬들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직접 야구장에 못 와 답답할 것이다. 그럼에도 먼 거리에서나마 우리를 응원하는 롯데 팬들의 열정을 알고 있다. 최고의 팬인 부산 팬들 덕에 우리가 야구를 하고 있다. 마지막은 2군 선수단과 코칭스태프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축하해주길 바란다. 이미 올 한 해 많은 성공을 거뒀다. ‘챕터1’이 끝났다. 이미 ‘챕터2’는 시작됐다. 2020년을 철저히 복기하고 돌아봐 1%의 성장을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다.”


- 흰 띠를 매고 한국에 왔다고 했는데, 지금은 검은 띠가 됐을까?

“절대(웃음). 여전히 흰 띠다. 늘 배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서튼이라는 사람이 전문성도 있고, 잘하는 분야도 있다. 하지만 누구라도 내가 놓쳤던 부분을 가르치고, 깨달음을 줄 수 있다. 배우지 못하는 순간 죽는다는 생각이다. 아마 난 죽는 순간까지 흰 띠일 것이다(웃음).”

서튼 감독은 2군 최종전을 마친 7일, 실내연습장에 2군 모든 구성원을 모아놓고 송별인사를 나눴다. 이 자리에는 영양사, 경비, 청소부 등 1년 내내 궂은일을 도와준 이들도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우리 팀을 위해 헌신해준 분들이다. 이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다. 롯데가,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을 우리만큼이나 응원해주는 감사한 분들”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KBO리그 선수시절 올스타 브레이크 때 봉사활동을 가고, 한국을 떠날 때 프런트 전 직원에게 자필 편지로 고마움을 전해 ‘친절한 서튼 씨’라는 별명을 얻었던 모습 그대로다. 서튼 감독이 생각하는 ‘원 팀’의 범위는 통념보다 넓다. 그가 말한 ‘챔피언십 컬처’는 단순히 2군 선수단이나 코칭스태프에게만 적용되는 단어는 아닌 듯하다.

최익래 기자 ing1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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