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리스트 김남중(왼쪽)과 기타리스트 신주헌이 연극 ‘돈데보이 : 가객들의 여행’ 중 ‘기다리는 자의 무곡’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제공 | 제레미비주얼스

비올리스트 김남중(왼쪽)과 기타리스트 신주헌이 연극 ‘돈데보이 : 가객들의 여행’ 중 ‘기다리는 자의 무곡’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제공 | 제레미비주얼스




클래식, 국악, 연극이 어우러진 융합 공연
즉흥 연주를 통해 드러난 연주자의 예술 철학
‘돈데보이’ 장면을 재현한 2부, 춤과 비올라의 위로
국내외 주요 무대 연주, 교육·기획을 넘나드는 활동
“악보는 종이에 남지만, 예술은 순간에 머문다. 그 찰나를 잡아채는 행위, 그것이 ‘즉흥’이다.”
공연을 앞두고 이 문장을 썼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한 줄의 문장이 하나의 완벽한 형상으로 실체화되는 장면을 10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눈으로 목격했다. 그것은 일종의 예술적 창조의 현장이었고, 불완전함마저 완성되는 순도의 시간이었으며, 무엇보다 숨 막힐 듯 아름다웠다.

● 찰나를 붙잡는 음악, 경계를 넘는 무대
비올리스트 김남중의 독주회 ‘완벽한 즉흥’은 타이틀처럼 완벽과 즉흥 사이의 경계를 유영하는 무대였다. 클래식과 국악, 연극이 각자의 영역에서 뛰쳐나와 ‘융합’이라는 기치 아래 집결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IBK챔버홀은 공연 시작 전부터 관객으로 가득 찼다. 로비는 북적였고 객석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김남중이란 클래식 아티스트의 대중적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지영희류 해금산조를 연주하는 김남중(가운데)과 고수 서수복(왼쪽), 해금연주자 노은아.  사진제공 | 제레미비주얼스

지영희류 해금산조를 연주하는 김남중(가운데)과 고수 서수복(왼쪽), 해금연주자 노은아. 사진제공 | 제레미비주얼스


공연은 앙리 비외탕의 ‘파가니니 오마주를 위한 카프리치오’로 시작됐다. 화려한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김남중은 비올라 한 대만으로 긴장감 넘치는 서문을 썼다. 이어 해금연주자 노은아(서울대 국악과 교수), 고수 서수복과 함께 지영희류 해금산조를 연주했다. 김남중의 시그니처 레퍼토리로 자리잡은 지영희류 해금산조는 해금과 비올라, 동양의 가락과 서양의 화성이 서로를 받아 안으며 이어가는 병주가 명품이다.

후반부의 ‘푸는 가락’ 구간은 즉흥 연주의 진가가 드러나는 시간. 노은아의 해금이 한바탕 가락을 풀어젖히고나자 김남중의 비올라가 화답의 불을 뿜었다. 국악의 언어로 푸는 카덴차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노은아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해금의 두 줄은 각각 기쁨과 슬픔을 상징한다. 그런 시선으로 본다면 비올라의 네 줄은 희로애락이 될 것이다.

이어진 프로코피에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발레음악이 원곡. 영화음악 분위기가 물씬하다. 언제부터인가 김남중의 연주는 영화, 연극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극적 요소가 짙어졌다. 개인적으로는 ‘눈으로 듣는 음악’이라 부르곤 하는데, 김남중의 음악은 점점 더 이 부분이 도드라져 간다. 그 진화와 변화의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기다리는 자의 무곡’에서 김남중의 비올라 연주에 맞춰, 미국으로 떠난 남편의 무사귀가를 바라는 아내의 간절한 심경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는 배우 오주원.  사진제공 | 제레미비주얼스

‘기다리는 자의 무곡’에서 김남중의 비올라 연주에 맞춰, 미국으로 떠난 남편의 무사귀가를 바라는 아내의 간절한 심경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는 배우 오주원. 사진제공 | 제레미비주얼스


●위로의 언어가 된 춤과 비올라
2부는 아예 연극의 한 장면으로 시작됐다. 김남중이 음악감독을 맡았던 연극 ‘돈데보이 : 가객들의 여행’ 중 하이라이트인 ‘기다리는 자의 무곡’이다. 불법 브로커를 통해 미국행 화물칸에 몸을 실었다가 질식사하고 만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는 젊은 아내의 간절한 무언의 소망,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 살아남은 자들에게 바치는 위로가 이 한 곡에 담겼다. 이 장면은 연극 무대에서도 보았는데, 뜨겁고 검은 무언가가 울컥 튀어오르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김남중의 비올라, 신주헌의 기타, 배우 오주원의 안무가 그날의 뜨거움을 독주회로 옮겨왔다.

2부 마지막 곡은 레베카 클라크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피아니스트 황지희가 함께했다. 1919년 버크셔 음악 페스티벌 초연 후 큰 호평을 받았던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비올라 레퍼토리의 정수로 꼽힌다. 비올리스트들의 황금 레퍼토리지만 김남중이 이 곡을 공식 무대에서 연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완벽한 테크닉, 기품있는 사운드,  개성적인 해석. 클래식 비올리스트로서의 ‘김남중’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연주였다. 


이날 함께 한 연주자들. (왼쪽부터) 고수 서수복, 배우 오주원, 비올리스트 김남중, 기타리스트 신주헌, 해금연주자 노은아 교수, 피아니스트 황지희.   사진제공 | 제레미비주얼스

이날 함께 한 연주자들. (왼쪽부터) 고수 서수복, 배우 오주원, 비올리스트 김남중, 기타리스트 신주헌, 해금연주자 노은아 교수, 피아니스트 황지희. 사진제공 | 제레미비주얼스


김남중은 서울예고와 서울대 음대를 실기 수석으로 입학하고, 서울대 콩쿠르 현악 부문 전체 1위, 동아콩쿠르 입상으로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았다. 서울시향 단원으로 활동하다 솔리스트로 전향한 이후 카네기홀·베를린 필하모닉홀·스페인 아구아마리나 극장 등 세계 주요 무대에서 초청 리사이틀을 이어왔다. UN 국제평화기여 예술가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서울시향 비상임이사를 맡고 있으며  융복합공연예술협회 및 엔클래식엔터테인먼트 대표로 기획과 예술을 넘나드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9월 이화여대 음대 초빙교수 임용을 앞두고 있다.
사진제공 | 제레미비주얼스

사진제공 | 제레미비주얼스


김남중은 말 없는 언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장면들을 연주하는 음악가다. 그는 네 줄의 비올라로 희로애락을 켜고, 장르의 경계를 넘어 인간의 서사를 들려준다. 이날 무대 위의 즉흥은 계산되지 않은 우연이 아니라, 끝없는 훈련과 응시 끝에 도달한 필연이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날 음악의 여운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납덩이를 매단 음표들처럼 듣는이의 마음 속 심연을 향해 무겁게, 조용히 눌러앉았던 것이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