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타 길들이기’의 유명한 엔딩. 오랜만에 가위를 잡은 리타(최여진)가 프랭크 교수(남명렬)의 머리를 잘라주는 장면이다.                   사진제공 | 극단 두레

연극 ‘리타 길들이기’의 유명한 엔딩. 오랜만에 가위를 잡은 리타(최여진)가 프랭크 교수(남명렬)의 머리를 잘라주는 장면이다. 사진제공 | 극단 두레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배우가 많을수록 좋은 연극일까. 그럴 리가. 때로는 단 두 명만으로도 무대를 꽉 채울 수 있다. 2인극의 대표작을 보고 싶다면 대학로 아트하우스에서 공연 중인 연극 ‘리타 길들이기’를 추천한다. 웃음으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관객을 잠시 멈춰 서게 만드는 멋진 공연이다.

영국 극작가 윌리 러셀의 희곡 ‘Educating Rita’가 원작이다. 1980년 영국에서 초연됐고 이후 영화와 뮤지컬로도 제작됐다. 이야기는 미용사 리타와 영문학 교수 프랭크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미용실에서 일하는 평범한 기혼 여성 리타는 어느 날 문득 생각한다. “이렇게 살다 끝나는 건가.” 그래서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냉소와 권태 속에 살아가는 교수 프랭크의 연구실 문을 두드린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문학에서 출발하지만, 물에 푼 물감처럼 삶의 이야기로 번져 간다.

‘리타 길들이기’는 흔히 2인극의 교과서로 불린다. 두 배우의 힘으로 버티는 공연이기 때문이다. 무대 대부분은 프랭크의 연구실이다. 장치 변화도 거의 없다. 사건이 쉴 새 없이 터지는 작품도 아니다. 손에 땀이 배는 스릴도 없다.

그런데도 지루할 틈이 없다. 긴장은 두 인물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처음 연구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리타는 말 많고 거침없는 미용사다. 대학 수업이 처음이라 낯설지만 주눅 들지 않는다. 교수의 질문과 상관없는 자기 생각을 쏟아낸다. 에너지 넘치는 리타와 달리 프랭크는 인생 자체에 지친 사람이다. 술에 기대 하루를 간신히 버티는 냉소적인 지식인이다. 연구실 책장 어딘가에 위스키병 몇 개쯤 숨겨놓을 것 같은 인물이다(실제로 그렇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다. 삶의 방식이 다르고 일상의 언어도 다르다. 그런데 문학 이야기를 계기로 대화가 이어지면서 관계도 달라진다. 교수와 학생의 거리에서 출발하지만 어느 순간 친구처럼 이야기하고, 결국 서로의 삶을 흔드는 존재가 된다.

이 작품의 핵심은 대화다. 무대 장치보다 배우의 말과 표정, 호흡이 훨씬 중요하다. 말투와 눈빛이 살짝만 흔들려도 극장의 공기가 달라진다. 많은 연출가와 배우들이 “배우의 기량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변화의 방향이다. 처음에는 프랭크가 리타에게 문학을 가르친다. 시를 읽는 방법을 알려주고 책을 권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리타는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으로 달라진다. 어느 순간부터는 프랭크가 오히려 그녀의 열정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최여진의 ‘리타’다. 처음 등장하는 리타는 수다스럽고 거침없다.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튀어나온다. 말은 빠르고 몸짓은 크다. 그 싱싱한 활력이 무대에서 펄떡인다. 객석에서는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진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리타의 말투와 움직임이 달라진다. 문학을 배우고 시를 읽으며 리타는 새로운 언어를 얻는다. 체호프, 셰익스피어, 윌리엄 블레이크, 예이츠, T. S 엘리엇. 이런 이름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린다. 변화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일어난다. 어느 순간 리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이 변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직선처럼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계단을 오르듯 한 단계씩 올라간다. 어느 순간 ‘툭’ 하고 높아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마다 최여진은 인물의 전환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리타가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들이다.

리타는 대사가 빠르고 많은 역할이다. 그래서 최여진의 대사 호흡이 잠깐 흔들리는 순간도 있었다. 그렇다고 공연이 흐트러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리타의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최여진의 리타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대를 꽉 붙잡고 있다.

‘프랭크’ 역의 류태호와의 호흡도 흥미롭다. 그의 프랭크는 냉소적이면서도 어딘가 애틋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다. 리타의 변화 앞에서 복잡한 마음을 드러낸다. 학생의 성장을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묘한 상실감을 느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리타 길들이기’다. 그런데 공연을 보고 나면 헷갈리게 된다. 결국 아무도 누군가를 길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누가 누군가를 길들일 수 있다고 믿는 생각 자체가, 이미 길들여진 생각인지도 모른다.

사진제공 극단 두레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