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영은·이상우의행복한아침편지]수화기저편그리운목소리

입력 2008-05-1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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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쉬는 날이 생겨도 저는 집 밖으로 제대로 나가보지 못합니다. 구석구석 밀쳐 두었던 집안 일이 제 발목을 잡고 있는데, ‘에라 모르겠다, 툭 차버리고 나가자’ 할 배짱이 아직은 없습니다. 그저 제가 좋아하는 원두커피 내려서 한 모금 마시고, 부지런히 쌓여있는 일거리들을 해치우는 게 제가 집에서 주말을 보내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날도 커피 한 모금 마시며 집안을 쭉∼ 둘러보고 있었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오는 겁니다. 누굴까? 하고 받아봤는데, 수화기 저 편에서 “저기 혹시 현주 언니 맞아요?” 하고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15년이란 세월이 폭 넓고 깊은 강물처럼 우리 사이에 놓여 있었지만, 저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누군지 금방 알아챌 수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은 첫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던 예전 그 때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두 달이라는 산후휴직기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지루하고, 얼마나 더디게 흘러갔는지 모릅니다. 할 일이 없어서, 친정어머니가 다 해놓은 청소도 눈치봐가며 슬쩍 슬쩍 또 닦고 몸도 대충 씻으라고 잔소리를 해대면 귓등으로 들으며 빡빡 때를 밀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던 산모였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친정어머니가 장을 봐 오시겠다며 나가셨을 때, 저는 제 이불 빨래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기의 비릿한 젖 냄새도 배어있고, 뜨거운 방에서 흘린 제 땀 냄새도 배어있었습니다. 한달 남짓 빨아 내지 못한 이불은 퀴퀴하고 쉰내가 가득했습니다. 저는 욕조에 물을 한가득 받아놓고 이불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세제를 풀어서 신나게 발로 밟으려 했을 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났습니다. 엄마가 벌써 돌아오셨나 꾸중들을 생각에 겁이 나서, “누구세요?” 하고 물어봤는데, 웬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조심스레) 저 아래층 사람인데요. 혹시 지금 욕조에 물 받으셨어요? 저희 집 목욕탕 천장에 지금 물이 떨어지는데, 지난번에 할머니께 저희 집 목욕탕 천장 샌다고 말씀드렸거든요, 혹시 모르셨어요?” 물었습니다. 저는 얼른 현관문을 열고 아래층 여자와 얼굴을 마주봤는데, 갑자기 그 아래층 여자가 제 몰골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겁니다. 손에는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있고, 바지는 무릎까지 올려놓고 있고, 그녀는 제가 뭘 하고 있었는지 금방 눈치를 챘습니다. “얼마 전에 아기 낳으셨다고 할머니가 그러시던데, 지금 빨래하시는 거예요? 산모가 무슨 빨래를 하세요?” 했습니다. 그러면서 화장실에 제 이불을 보고는 “어머나 세상에! 이불 빨고 계셨어요? 산모가 저런 빨래하면 나중에 손목 아파서 못써요” 하면서 자기가 빨아주겠다고, 제가 말릴 새도 없이 저희 집 목욕탕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평소 설거지 하나도 남의 손에 맡기지 않던 저였는데, 왜 그때는 넉살좋게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린 그 동생에게 이불빨래를 맡겼는지 참 모를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때 그 일이 빌미가 돼서 동생은 우리 집으로 아침마다 차를 마시러 왔습니다. 티타임으로 얘기를 나눠보니 저와 닮은 데가 참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책 읽기 좋아하고, 가끔은 서투른 글도 써보고, 낯가림이 심해서 사람 사귀는 일에 서툴고…. 하지만 저보다 3년이나 더 빨리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저는 책으로 해결되지 않는 산지식을 그 동생으로부터 많이 배웠답니다. 그랬는데 갑작스럽게 강원도 어디로 이사를 가버렸고, 그렇게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동생과의 전화를 끊고 오랜만에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정말 그리웠다’ 이 말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뻐근하게 올라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하얀 편지봉투에 또박또박 제 이름 석자가 적혀 있는 답장을 받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 후, 시외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그 친구를 만나고 왔습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동생은 그대로 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제 마음도 맑게 헹구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자주는 못 보겠지만, 다시 연락 끊기지 않고 오래오래 인연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경남 밀양|김현주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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