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의 공격. 타석에는 4번 타자 이대호. 투아웃 주자는 2·3루. 투 스트라이크 투 볼, 한화 투수 류현진 와인드 업! 안쪽 파고드는 약간 높은 공, 아! 맞았습니다! 넘어갑니다, 넘어갑니다! 좌측 펜스 깊숙이 떨어지는 … 홈~런! 5-3! 롯데 자이언츠가 7회말 역전합니다!” 자, 바로 여기다.
“부산 가알~매기, 부산 가알~매에기이, 너는 버얼~써어 나를 이이저었나아~” 부산 사직구장에서 ‘부산갈매기’를 목놓아 불러보지 않은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야구팬이 아니거나, 혹은 부산사람이 아니거나.
대전역에서 유성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기사 양반에게 ‘부산갈매기를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부산갈매기를 코로 흥얼거리던 기사는 “조용필 아닌가요?”라고 했다. ‘땡!’. 대한민국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는 노래. 하지만 허다한 사람들이 ‘조용필이 불렀다’고 오인하고 있는 노래. 행운과 비운을 동시에 타고난 가수, 문성재(56) 씨를 만나러 가는 날은 오후 내내 옅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산갈매기의 가수이자 많은 사람들이 부산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 문성재 씨는 본래 제주출신이다. 1970년대 후반 가수로 데뷔하면서부터는 주로 대전·유성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부산에서는 2년 남짓 생활했을 뿐이다. 제주, 창원, 부산을 찍고 지금은 다시 ‘제2의 고향’같은 유성으로 돌아와 라이브 음악·코미디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문 씨는 스스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26년이란 세월을 ‘부산갈매기’로 살아왔다. 이제 부산갈매기는 문성재가 아닌, 부산과 야구팬들의 공동소유재산이 되어버렸다. 가끔은 억울한 생각이 들 법도 한데 돌아온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였다. 그는 ‘부산갈매기’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복 받은 인생이며, 행복한지를 반복해 강조했다.
야구를 몰랐던 문 씨는 이제 광적인 야구팬이 되었다. 롯데 자이언츠 개막전에도 몇 번이나 불려나갔다.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서 가게를 열어도, 부산팬들은 그의 가장 든든하고 고마운 고객들이었다. 그는 말한다.
“‘부산갈매기 부른 가수다’ 이거 하나로 끝나는 거죠.”
- 부산갈매가 나온 게 1982년이죠?
“당시 제가 유성 나이트클럽 밴드에서 노래를 하고 있었어요. 저랑 절친한 나이트클럽 ‘형님’ 한 분이 계셨죠. 그쪽이 대부분 다 ‘주먹’이잖아요. 그 형님이 하루는 ‘성재야, 이왕이면 주먹들을 위한 노래 좀 해봐라’하더군요. 왜 있잖아요? ‘눈물도~ 한숨도 ~’ 맨발의 청춘같은 거. 일본에는 ‘야쿠자풍’의 노래들이 많은데 우리는 그런 게 없었거든요. 그래서 작곡자에게 ‘특별부탁’을 했죠.”
부산갈매기는 작곡가 김중순의 작품이다. 문씨에 따르면 멜로디 자체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편곡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1980년대 히트곡 제조기로 이름을 떨친, 그룹 ‘사랑과 평화’ 출신의 김명곤이 편곡을 했다. ‘띠띠리~ 띠띠띠~’로 시작되는 기타 사운드가 귀에 착착 들러붙는다. 물론, ‘형님’은 입이 벌어지도록 대만족했다.
문성재 씨는 1970년대 후반에 ‘언제라도 갈 테야’로 데뷔했다. 당시 동기는 전영록, 혜은이, 계은숙 등이었다. ‘언제라도 ~’는 대박이었다. 흑백 TV 시절, 그는 가장 잘 나가는 가수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춤추는 작은 소녀’와 ‘부산갈매기’로 초대형 ‘잭팟’이 터졌다. 이 해 문 씨는 KBS가요대상 10대가수로 선정됐다. MVP는 조용필이었지만.
- 주로 트로트를 부르셨는데요?
“제가 원래 뽕짝가수에요. 그런데 전 가수지만 제가 노래 잘 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부산갈매기만 해도 프로들이 부르기엔 정말 어려운 노래에요. 아마추어한테는 쉽죠. 특별히 가창력이 필요한 노래도 아니고. 쉬운 노래일수록 가수들은 부르기가 더 힘들어요. 아마추어는 자기가 즐거우면 되지만, 가수는 듣는 사람이 즐거워야 하는 거잖아요?”
문 씨는 스스로 ‘복 받은 놈’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뒷걸음질 하다가 부산갈매기 하나 밟아서, 지금까지 먹고 산다’는 얘기.
“복 받았죠. 부산갈매기처럼 전 국민적으로 불리는 노래는 드물잖아요. 그것도 내가 불러서 알려진 게 아니라, 부산사람들이 ‘대신’ 불러줘서 전파가 된 거고요. 당대 송창식이 얼마나 유명했어요? 하지만 그의 노래가 부산갈매기처럼 불리지는 않죠. 김정호의 ‘이름모를 소녀’ ‘하얀 나비’ 같은 것도 그렇고.”
가수로 고속 성공질주를 거듭하던 그의 인생에 급제동이 걸린 것은 1983년, ‘부산갈매기’가 나온 이듬해였다. 88고속도로 건설을 축하하는 KBS ‘백분쇼’ 특집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전남 광주에 내려갔다가 올라오던 도중 승용차와 대형 충돌사고가 났다. 당시 승합차에는 문 씨와 밴드멤버들이 타고 있었고, 문 씨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많이 다쳤어요. 난 얼굴(흉터를 보여주었다)을 크게 다쳐 서울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었어요. 특히 나팔 부는 분이 나처럼 많이 다쳤는데 다행히 대전에서 성형외과의로 계시는 최규남 원장님이 무료로 그 분을 수술해주셨죠. 지금도 잊지 못할 고마운 분입니다. 연락이라도 한 번 드려야 하는데 ….”
메이저 가수로서의 생활은 그것이 끝이었다. 이후 문 씨는 모든 것을 접고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갔다. 모처럼 친구들도 만나고, 나이트클럽도 열었다. 이벤트에도 손을 댔다. 하지만 노래는 하지 않았다. 노래가 싫었다. 친구들이 “야, 임마! 제주도에는 갈매기가 없냐? ‘제주갈매기’ 한 번 내봐라”하고 졸라댔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가 몇 년 전 경남 창원 시민의 날 KBS 열린음악회 무대에 섰다. 평생 그렇게 많은 관중 앞에서 노래하기는 처음이었다. 현철, 설운도와 함께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20분 이상 노래했다. 어지간한 그도 간만에 큰 무대에 서자니 다리가 후들거려 청심환을 두 개나 먹고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그 뿐이다. 더 이상 방송활동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쉬움은 있어 올 초 ‘유성의 거리’라는 음반을 냈다. 가수 활동 재기용이라기보다는 개인 음악생활의 회고·정리용이라 보는 게 맞다.
이번 음반에는 자작곡도 한 곡 넣었다.
“전 이제 가수 안 해도 돼요. 부산갈매기 이상 좋은 곡을 부를 수도 없고요. 이렇게 작은 가게 하나 꾸리면서 좋아하는 노래 부르고, 사람들 만나고, 술도 마시고. 원래 제가 술을 안 마셨는데, 마신 지 딱 6년 됐거든요? 술이란 게 마셔보니 정말 좋더군요, 하하! 제가 보기보다 깐깐한 편인데 술을 마시니 성격이 좋아져요.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좋아하더군요.”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다. 건강하게 살 수 있으면, 재미있게 살 수 있으면 그만이다. 어제는 언제나 어제고, 내일은 항상 내일이다. 오늘이 즐거우면 한달이 즐겁고, 일년이, 십년이 즐겁다. 소원이 있다면 노래하다 죽든지, 술 먹다 죽든지, 골프 치다 죽는 것이다.
제주도가 제1의 고향이라면 대전은 제2의 고향, 제3의 고향은 부산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한화 이글스하고 롯데 자이언츠하고 붙으면 어느 쪽을 응원하시나요?”
“물론 롯데죠.”
○ 부산갈매기의 작곡,작사자 김중순
기록을 찾아보니 공교롭게도 롯데 자이언츠의 성적은 부산갈매기와 함께 뜨고 내려앉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롯데 자이언츠가 우승한 것은 1984년과 1992년 두 차례. 1999년 반짝 2위에 올랐으나, 이후 2000년대 들어서는 4년 연속 꼴찌만 하며 밑바닥을 긁었다.
부산갈매기가 만들어져 대중의 인기를 얻은 것은 1982~83년. 그리고 1999년은 부산갈매기의 작곡가 김중순이 삶의 날개를 접은 해였다.
부산갈매기의 원 작곡자 김중순 씨는 1999년 향년 61세로 작고했다.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며 작곡보다는 작사에 힘을 기울였다. 삼성그룹의 고(故) 이병철 회장이 좋아했다는 ‘울려고 내가 왔나’(남진)를 비롯해 ‘진정 난 몰랐네’(임희숙) ‘난 정말 몰랐었네’(고 최병걸) ‘정 주고 내가 우네(박일남)’ 등의 주옥같은 곡들에 가사를 붙였다.
작곡가로서는 ‘빗물(채은옥)’ ‘잃어버린 정(김수희)’ ‘부산갈매기’ ‘십오야(와일드캐츠)’ 등이 김 씨의 작품이다. 고인과 30년 우정을 쌓은 후배 작곡가 신동훈(58) 씨는 지금도 김 씨 생각만 하면 그리움을 주체하기 어렵다.
“성격이 곧고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할 줄 모르는 양반이었지. 원래 그 분이 문인출신이에요. KBS 당선작가. 그 시절이야 뭐 작곡가, 작사가에 대해 제대로 대접을 했나? 그냥 술 마시다 ‘필’ 받고, 뚱땅하면 노래 하나 나오는 거지. 우리 둘이 만든 히트곡을 세어보니 대충 한 26개 되던가 …. 돈은 하나도 못 벌었어.”
당시 김 씨와 신 씨가 손을 댔다 하면 무조건 대박이었다. 대중음악계에서 두 사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유성에 초청을 받아 갔다가 문성재를 봤고, 나이트클럽 사장에게 ‘남자다운 곡 하나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 잘 나가던 킹 레코드사의 사장 ‘킹박’(박성배 씨)으로부터 “요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떴다”는 얘기를 듣고는 김 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것보단 나은 곡 만들어야겠지?”
김 씨는 죽기 전 저작권 등 모든 것을 신 씨에게 물려주고 떠났다. 신 씨의 마지막 소원은 한 가지. 부산 태종대에 ‘부산갈매기’ 노래비를 세우고 김씨의 유골을 모시고 싶다. 김 씨를 회고하며 ‘정 주고 내가 우네’를 읊조리던 신 씨는, 결국 수화기 너머에서 울먹이고 있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