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하게 직장을 다니던 30대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바이크 세계여행을 떠난다’ 우리나라에서 이에 대한 반응은 대부분 '미쳤다'와 '멋있다'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그게 미친 것이든 멋진 것이든 간에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를 실행에 옮기는 데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조금 더 많은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할 뿐이다. '푸른 늑대를 찾아서'라는 이름하에 유라시아 횡단 및 아프리카 종단 바이크 여행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송인근(35) 씨 역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30대 남성이다. 거창한 목표를 지닌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떠난 여행도 아니지만 그가 지나고 또 지나갈 50000Km의 여정은 마찬가지로 조금 더 용기를 발휘할 예비 모험가들에게 하나의 참고서가 될 만하다. 이에 동아닷컴에서는 송인근 씨의 9개월에 걸친 여행기를 1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국경을 넘어 몽골리아로
조금 익숙해진 러시아를 떠나 몽골 국경을 넘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까진 300km 이상 남아있고, 국경을 넘은 시간은 벌써 오후 다섯 시가 넘었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할 시간인 것이다.
그저 도로를 따라 달릴 뿐이지만 지평선의 끝엔 또 다른 초원이 펼쳐져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그 광활함에 새삼 놀라움이 다가온다.
서서히 내려오는 어둠과 함께 울란바토르는 가까워오지만 도로를 바라보는 내 시야는 점점 멀어져 갔다. 어둠이 완전히 깔릴 무렵 울란바토르는 불과 몇 십km 앞으로 다가왔지만 난관은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포장도로는 공사구간이고 나는 오프로드인 이면도로로 달려야 했다. 바이크의 중심이 자꾸 무너지고 지나가는 차량이 너무 많았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날리는 흙먼지에 시야는 정말 암흑 상태였다.
다행히 무사히 그 구간을 지나치긴 했지만 굉장히 긴장되던 순간이었다. 자정이 다 돼서야 울란바토르에 도착했다. 도시의 불빛은 그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다. 언제나 무사했음에 감사한다.
● 고마운 나의 친구 주우카, 툴가, 데기
울란바토르에서 현지 휴대폰을 개통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몽골인 ‘주우카’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한국분이 소개해준 주우카는 툴가, 데기라는 친구와 함께 왔고, 모두 한국에서 유학하고 일했던 친구들이라 한국말이 굉장히 능숙했다. 이렇게 인연이 늘었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몽골이름이 필요하다고 했고, 이 친구들은 짐짓 심각하게 고민을 거듭하다 ‘사이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실제 몽골에는 사이나란 이름도 많고 ‘좋다’란 뜻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음에 들었다. 러시아 이름 ‘이르고’에 이어 몽골 이름 ‘사이나’가 생겼다.
울란바토르에서 머문 일주일뿐만 아니라 몽골을 여행하는 내내 그 친구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도움을 받고 서로 안부를 물었다. 거친 몽골의 비포장도로를 홀로 달리며 잦은 고장과 사고에도 마음 한편에 든든함이 있었던 것은 이 친구들 덕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알아갔고 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 쉽지 않은 테를지 국립공원
테를지 국립공원은 울란바토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몽골을 횡단하기 앞서 연습 삼아 테를지 국립공원 내 오프로드를 달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초원을 달리는 기분은 상쾌했다.
울란바토르로 돌아가는 길에 초원으로 된 언덕에 올라 풍경을 살폈다. 작은 언덕이지만 올라가서 보니 또 다른 풍경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멋진 풍광 속에 나밖에 없다는 게 신기하고 자유롭다.
내친김에 멀리 높지 않은 산까지 바이크를 내달렸다. 자신감 있게 오른 산길이었지만, 아차! 너무 만만하게 봤다.
정상에 거의 다 올라올 무렵 경사는 심해지고 흙, 모래 구덩이가 많아졌다. 갑자기 뒷바퀴가 헛돌아서 브레이크를 잡았지만 바이크는 가파른 경사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으나 조그만 웅덩이에 뒷바퀴가 빠지고 말았다.
있는 힘껏 바이크를 끌어올리고 스로틀을 당기며 빠져나오고 다시 미끄러져서 웅덩이에 빠지기를 수차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자유롭고 좋았던 기분은 불과 몇 분 만에 암담하고 답답하게 바뀌었다.
한참을 거친 숨소리와 땀방울을 쏟아낸 후에야 겨우 바이크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숨 막히는 경치, 힘들었지만 보상은 충분했다. 테를지 국립공원은 이렇게 멋진 풍경을 쉽게 보여주기 싫었나보다.
● 지독하게 운이 좋았던 몽골 횡단
몽골 도심의 도로는 꽤 번잡하고 무질서했다. 곳곳에서 경적이 울려대고 아슬아슬하게 차량과 사람이 교차하는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진다.
다소 조급한 마음으로 숙소를 향했지만 기어코 악재는 나를 덮쳐왔다. 숙소 근처에 와서 좌회전을 하려다가 반대편 차선에서 달리던 차량과 부딪쳐 접촉사고가 발생하고만 것이다.
몸은 다치지 않았지만 차량 한 쪽에 스크래치가 나고 내 바이크는 부딪쳐 넘어지면서 핸들바를 비롯해 몇 가지가 망가졌다.
러시아 올혼섬에서 바이크 고장으로 몸과 마음이 고생한 게 얼마 전인데, 울란바토르 도심에서 차량과 사고라니 답답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사고에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내가 잘못해서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했고 차량 수리비를 물어주기로 했다. 사고 발생 몇 시간 만에 상황은 종료됐고 또다시 수리가 필요한 바이크만 남았다. 가뜩이나 여행비용도 부담이 되는데 불의의 지출은 마음을 쓰리게 했다.
이미 발생한 사고, 몸이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아쉬움을 떨쳐 보냈다.
하지만 이 사고는 시작에 불과했다. 몽골리아를 횡단한다는 것은 무수히 다양한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함을 의미한다.
바양홍고르에서 알타이까지 가는 길은 정말 비포장도로의 연속이다. 어차피 달려야 할 길이라면 즐기면서 달리자고 생각했지만 몽골의 비포장도로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충분한 적응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거침없이 달리다 진흙물 세례를 받은 것은 약과이고, 비포장도로를 달린지 1시간이 되지 않아 물웅덩이에 처박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바이크는 기어시프트가 휘어져 있는 것 말고 특별한 문제는 없었으나 신이 나서 달리던 몽골의 도로는 이제 긴장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갈길, 모래밭, 흙밭, 물웅덩이, 돌길, 진흙길 등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길이 펼쳐지는 몽골의 비포장도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을 강요했다. 몽골의 멋진 풍광을 즐길 여유는커녕 점점 피로가 쌓여갔다. 어차피 가야할 길, 이 순간을 즐기자고 수없이 되뇌었지만 결국 사고는 피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돌들로 가득한 비포장도로의 코너를 돌다가 왼쪽 패니어백이 돌에 부딪혔고, 뚜껑이 큰 유격이 생길정도로 구부러졌다. 망가진 거다.
바이크 휀더를 보니 나사가 풀리고 다시 부러져 있었다. 아마 웅덩이에 빠졌을 때의 충격과 도로의 진동에 의한 충격이 더해져 망가져버린 것 같다. 왼쪽 사이드라이트도 또 떨어져 너덜거리고 있었고, 바이크에 붙어 있는 모든 것들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멀쩡한 건 엔진하고 바퀴, 그리고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달릴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타이에서 고장 난 부위를 수리하고 또 다시 비포장도로에 올라섰다. 갈 길은 먼데 바이크 출력이 이상해진다. 카울을 벗겨보니 배터리를 연결하는 전선문제였다. 수리가 되어 또 달린다. 주유소에 가보니 번호판이 덜렁거린다. 가지고 있는 끈으로 고정하고 또 달린다.
번호판이 매달린 뒤쪽 휀더가 떨어져 나갔다. 라이트에 연결된 전선이 휀더를 떨어지지 않게 해주고 있었다. 비포장도로의 진동과 단기통의 진동이 떨어질 수 있는 건 다 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잃어버리지는 않았으니 난 지독히 운이 좋은 여행자이다.
● 몽골의 자연 속으로
하르호린 에르덴조 사원에서 나와 간선도로를 향해 가는 중 다시 비포장도로를 만나게 됐다.
오프로드에 가까운 비포장도로는 쉽지는 않지만 충분히 달릴만한 길이다. 정말 아름답고 재미있다. 거대한 초원을 가로지르는 오솔길을 좌우로 달리고, 위아래로 울렁이는 웅덩이를 스탠딩자세로 헤쳐 나갔다.
이 길을 달리는 자체만으로도 즐거운데 자연의 품속에 나 홀로 있다는 점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바이크의 엔진음과 타이어의 마찰음은 바람소리와 어우러져 하나의 음악이 됐다.
특히나 초원을 달리다 만난 수 백마리의 양떼가 나를 피해 흩어지는 모습은 저절로 탄성이 나오게 했다.
몽골의 자연은 너무 다양한 형태와 색감으로 여행자를 감동시킬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염소, 양, 소, 말, 낙타들이 자유롭게 초원을 거닐며 내 발길을 멈추게 했고, 벌거벗은 산과 다채로운 초원은 시선을 사로잡았다.
더욱이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이 평원 속에는 나뿐이다.
대자연 속의 자유는 인간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몽골의 음식은 초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자란 고기들로 가득하다. 몽골의 음식은 화려한 플레이팅과 향신료, 갖은 재료를 쓰지 않아도 큰 고기덩어리 하나가 모든 것을 만회한다.
자연도, 음식도 화려하거나 호사스럽지 않지만 그 거대한 덩어리 자체가 나를 압도하고 진한 천연의 맛을 선물했다. 몽골을 달린다는 것은 이런 맛이었다.
● 몽골의 마지막을 불태우다
달리고 또 달리는 것만으로도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 몽골도 어느덧 떠날 때가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도시 을기에서 하루면 몽골에서 다시 러시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불안과 걱정을 안겼던 비포장도로는 이제 언제 다시 이 길을 달릴 수 있을까하는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몽골의 마지막을 장식할 특별한 경험을 계획에 나섰다. 그리고 이는 정말로 잊기 힘든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을기에서 알타이 산맥쪽으로 달려 화이트강을 지나면 알타이 고대벽화가 있었고, 원래는 투어버스를 이용할까 했지만 바이크로 달려보기로 결심했다.
국경지역인데다가 오지여서 내 위치를 알 수 있는 스팟기계를 차야한다는 이야기와 어제 내린 비로인한 길 상태 등이 약간은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몽골에서의 마지막을 장식하겠다는 각오가 더욱 강했다.
도중에 주유를 하러 들어선 쿠슈어트 마을에서 진흙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작은 사고가 있기도 했지만 발길을 되돌릴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비포장도로를 하늘이 어두워지고 느닷없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바람이 몸을 휘감고 빗물이 온몸을 때려대자 철수할까, 전진할까, 고민이 시작됐다.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비바람과 함께 천둥과 번개까지 내리치고, 시야는 점점 좁아지자 이 넓은 산길을 홀로 헤쳐 나갈 자신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바이크와 나와 함께 즐기던 자연이 이제는 너무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두려움은 곧 공포로 바뀌었고, 말 그대로 왔던 길로 ‘도망’을 갔다. 대자연 속에 나란 존재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긴장한 마음에 진흙밭에서 4, 5m를 미끄러졌지만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급하게 바이크를 세우고 바로 엑셀레이터를 당겼다.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고 도망갔다. 앞 뒤 잴 것 없이 도망쳐 겨우 마을에 도착했고 그제야 한 숨을 돌렸다. 자연 앞에 나약하고 작은 제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몽골리아의 마지막 도전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이 마무리 됐지만, 내 마음속에 더 큰 것을 보고 왔다. 자연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건방떨고 살지 말자.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몽골 횡단은 마무리가 되었고 핸들은 다시 러시아를 향했다. 이제 한 고비를 넘은 것 뿐이다.
※보다 자세한 여행기는 송인근씨의 블로그 (http://songig0831.blog.me)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글·사진 송인근 / 감수 동아닷컴 최현정 기자 gagnrad@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