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남닷컴] 뮤지컬 벤허 아이비, “내가 매긴 내 점수는요”

입력 2017-09-28 1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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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아이비. 사진제공ㅣ뉴컨텐츠컴퍼니

전장에 핀 한 떨기 꽃 같은 여인이 무대에 남는다. 처연한 모습이다. 어깨는 내려앉았고, 시선은 허공에 머문다. 여인의 입이 열릴 듯 말 듯 하더니, 이윽고 나지막한 노래가 시작된다.

“예루살렘 작은 산 아래 버드나무 가지 위, 처음 익은 열매처럼 그곳에, 나 그곳으로 가고 싶어라.”

노예로 팔려간 여인 에스더가 고향에서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부르는, 뮤지컬 벤허의 명 넘버다. 뮤지컬 아이다에서 역시 이집트에 노예로 잡혀간 공주 아이다가 고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며 부르는 노래 ‘Gods love Nubia’와 비견될 만한 곡이다.

남자들의 땀 냄새가 진동하는 근육질의 뮤지컬 벤허 속에서 비중이 높다고 할 수 없지만, 이 한 곡만으로도 에스더의 존재감은 충분히 빛이 난다. 아니, 아이비가 아니었다면 에스더는 그냥 그런 ‘비련의 여인’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요즘 이거에 꽂혔거든요. 맛있어요.” 인터뷰를 위해 공연장인 충무아트센터 1층 카페에서 만난 아이비가 젤리 한 통을 내밀었다. 젤리 하나를 우물거리며 노트북을 꺼냈다.

“영화에서는 에스더가 벤허의 아내로 나오지만, 뮤지컬에서는 집사의 딸이라는 차이가 있어요. 벤허를 사랑하지만 신분의 차이로 고백하지 못하는. 상처받은 벤허와 그의 가족을 끝까지 보살피는 지고지순한 캐릭터죠.”

벤허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 찰톤 헤스톤 주연의 전설적인 명화로 잘 알려져 있다. 남북전쟁 영웅이었던 루 월리스 장군이 1880년에 쓴 소설 ‘벤허: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이 명화의 원작이다. 찰톤 헤스톤이 유다 벤허를 맡은 1959년의 영화가 유명하지만 최초는 아니다. 1925년 프레드 니블로 감독이 연출한 무성영화 ‘벤허’가 있었다.

2016년 티무르 베크맘베토브 감독이 리메이크했지만 1959년작의 전설에는 한참 못 미쳤다.

영화가 아닌 다른 장르에 속하지만 비교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연출을 맡은 왕용범의 제작노트에는 고민의 혈흔이 번져 있다. 하지만 왕용범 역시 한국 최고의 뮤지컬 연출가.

“벤허 때문에 긴 시간 동안 유대와 로마를 연구했습니다. 벤허를 준비하면서 수많은 고민과 선택의 번민에 휩싸여 몇 년을 고통 속에 지냈습니다. 하지만 관객 여러분께서는 저의 고통을 나누기보단 온전히 공연을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뮤지컬이니까요.”
하고 훌훌 털어버렸다.

아이비를 가수 아닌 배우로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이비는 어쩌다 인연이 닿으면 한 번씩 뮤지컬 무대에 서는 가수를 벗어나, 끊임없이 무대 위에서 아이비가 아닌 캐릭터의 옷을 입고 관객과 만나는 배우다. 2010년 ‘키스 미 케이트’로 뮤지컬에 데뷔했으니 벌써 8년차 배우가 됐다.


- 에스더는 청순한 역할입니다. 그러고 보면 참 다양한 역할을 연기해 왔군요. 에스더처럼 청순한 역할(고스트), 백치미의 여인(유린타운), 귀여운 여인(위키드), 섹시한 쇼걸(시카고), 금수저 공주(아이다). 할 건 정말 다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많이 하긴 했네요(웃음).”


- 그런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아이비’하면 ‘섹시’를 떠올리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기대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섹시한 역할’은 아직 보여주지 않은 것 같은데요. 혹시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닌가요.

“처음부터 끝까지 섹시한 역할이란 게 있을까요? 섹시한 춤만 추다가 끝날 수도 없고. ‘마타하리’라고 해도 마냥 섹시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건 아니니까요. ”

가수 아이비. 사진제공ㅣ뉴컨텐츠컴퍼니



-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네.”


- 혹시 ‘마타하리’도 염두에 두고 계신 건 아닌가요?

“마타하리요? 하하, 워낙 큰 언니(옥주현·차지연)들이 하셔가지고. 전 아닌 것 같은데요(웃음).”


- 과거 인터뷰에서 “해볼 건 다 해봤고, 이제 멋있는 역할만 남았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에스더가 그 ‘멋있는 역할’인가요.

“멋있다의 기준이 어떤 걸까요.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한 역할들이 다 멋있는 역이었던 것 같아요. 아, 이런 건 있어요. 좀 독특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요. 상당한 연기력을 요하는. 그게 꼭 뮤지컬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연극도 좋고요. 작은 무대, 작은 극장에서 관객과 좀 더 가까이에서 만나고 싶어요. 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겠죠.”


- 연극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섭외가) 들어와 주면 할 텐데(웃음). 아마 안 할 거라고 생각해서 아예 말씀도 안 해주시는 걸까요.”


- 가수 아이비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역시 ‘아이비 하면 춤’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뮤지컬 배우는 춤, 연기, 노래의 삼박자를 모두 갖춰야 하는 직업이죠. 아이비라는 ‘배우’가 가진 재능이랄까 기량이랄까. 제 개인적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노래 > 연기 > 춤’입니다. 그러고 보니 춤이 꼴찌네요(웃음).

“뮤지컬은 역시 노래가 가장 중요한 것 같긴 해요. 그리고 춤 얘기라면 … 사실 그 동안 엄청난 댄스 실력을 요구하는 역할이 별로 없었어요.”


- 시카고의 록시 하트는 섹시한 춤을 선보이지 않나요.

“록시도 벨마에 비하면. 벨마는 무용을 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역할이거든요. 최정원 선배님처럼 록시를 하다 벨마를 하신 분은 정말 … 최정원 선배님만 가능하실 거예요.”


- 춤 얘기 하나만 더 하고 넘어가죠. 사람들이 ‘춤의 여신’으로 생각하는 아이비 배우는 자신의 댄스 실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제가 봤을 때 전 표현력이 좋은 사람이지 기술적으로 봤을 때는 별로 …(웃음). 습득이 느려요.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죠. 하지만 딱 무대에 올라갔을 때, 거기서 끼를 발산하는 거죠. 표정이나 에너지로 갖고 가는 거. 사실 따져보면, 그렇게 잘 하지는 않거든요.”


- 노래는 어떨까요. 자신이 생각하기에.

“악보를 보는 게 쉽지 않아요. 악보를 보고 ‘이건 몇 박자 …’ 식으로 따지는 거. 지금까지 한 작품들은 항상 OST가 있었거든요. 가이드가 있었고, 음악을 외우면 됐어요. 하지만 벤허는 창작이거든요. 들려오는 음악이 아니라 악보를 보고 외워야 하는 거죠.”


- 연습할 때 어려움이 있었겠네요.

“피아노 반주로 외우라고 악보가 왔는데 당황스럽더라고요. 이런 걸 처음 해보니까. 이성준 음악감독님한테 털어놨죠. 저 피아노 반주만으로는 악보 못 외운다고. ‘아, 이런 게 처음이시구나’하시더라고요. 함께 에스더 역을 맡고 있는 (안)시하는 금방 외워 오더군요. 전 시하 하는 거 듣고 외우기도 하고. 그런데 이런 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되겠구나 싶었어요. 항상 만들어져 있는 캐릭터만 하다가 … 신선했죠.”


- 에스더라는 배역의 어디에 끌렸습니까.

“아이다를 하면서 무대 공포증 같은 게 생겼어요. 쉬지 않고 한 배역(암네리스 공주)으로 1년을 달렸으니까요. 영혼이 지쳤다고 해야 하나. 사실 암네리스를 연기하면서 제 안에서는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죠.”


- 흥미롭군요. ‘내 안의 전쟁’이라니. 좀 더 구체적으로.

“부담이 컸던 거죠. 여배우라면 누구나 맡고 싶고, 정말 훌륭한 배우들이 거쳐 간 배역이니까. 행복하지만, 즐기지 못했던 거죠. 얼굴이 ‘즐기는 얼굴’처럼 생겨서 티는 잘 안 났겠지만(웃음). 그래서 다음 작품에서는 뭔가 스스로 안정을 얻으면서도 배울 수 있는 캐릭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딱 에스더 역의 제안이 들어온 거죠. 바로 오디션을 봤어요.”


- 뮤지컬 벤허는 원작을 충실히 따랐나요.

“최대한 원작에 가깝다고 보시면 됩니다. 왕용범 연출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벤허는 벤허다’. 지금까지 원작의 벤허를 수정하고, 또 리메이크한 작품들이 꽤 있어요. 하지만 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는 거죠.”

가수 아이비. 사진제공ㅣ뉴컨텐츠컴퍼니



- 뮤지컬은 여전히 아이비라는 사람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장르일까요.

“어유, 그럼요. 무대에 서는 건 여전히 좋은데, 좋은 역할을 맡을수록 부담이 커지는 건 사실이에요. 스스로 의심이 들었죠. 자신감이 없었던 거예요. 제 스스로를 저 자신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것. 사실 그런 생각없이 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 건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 우리들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컨디션이 좋았다 나빴다 하는데, 배우들도 마찬가지인가 보군요.

“그럼요. 그래서 항상 긴장감 속에서 살죠. 작품이 끝나면 한 번씩 크게 아파요.”


- 시카고의 록시하트 역으로 여우신인상을 받았죠. 여우주연상은 언제쯤 받게 될까요.

“(웃음) 저한테 상은 의미가 없어요. 욕심도 없죠.”


- 많은 여성분들이 아이비 배우의 몸매 관리를 궁금해 합니다.


“사랑과 영혼이란 영화로 잘 알려진 고스트란 뮤지컬에 출연한 뒤에 살이 엄청 쪘었죠. 공연이 끝나면 너무 지쳐서 야식을 많이 먹었거든요(웃음). 요즘도 살이 자꾸 쪄서. 사실 전 손목과 발목만 얇아요. 그래서 살이 덜 쪄 보이는 편이죠. 죄송합니다~(웃음).”


- 기존의 인터뷰에서 ‘해보고 싶은 역할’을 두 개 꼽았습니다. ‘오페라의 유령’ 크리스틴과 ‘맘마미아!’의 소피였죠. 크리스틴은 몰라도 소피는 이제 더 미룰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크리스틴. 크으~ 그거 했다가는 욕먹을 것 같은데요. 둘 다 못해요. 해보고 싶은 역할일 뿐이라고요! 스무살 소피는 이제 다음 생애에서 하는 걸로. 서른여섯살 여배우가 할 배역은 아니죠. 열 살만 젊었다면 크리스틴은 정말 해보고 싶었을 거예요. 피가 나도록 성악을 연마해서 말이죠. 위키드 때 성악을 배우면서 크리스틴의 넘버들이 너무 좋더라고요. 사실은 지금도 매일 불러요. ‘Think of me’ 같은 넘버들. 뭐 절대 (고음이) 올라가지는 않지만 연습은 해요. 만약 1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성악을 제대로 공부해서 해보고 싶어요. 뭐 지금으로선, 불가능?”


- 벤허에서 가장 좋아하는 넘버를 소개해 주신다면.

“다 좋지만 굳이 제가 부르는 넘버를 고른다면 역시 ‘그리운 땅’이겠죠. 노예로 끌려가서 몇 년 고생한 뒤 부르는 슬픈 노래죠. 울부짖는 노래예요.”


- 이제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네요. 클로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벤허는 스펙터클한 작품이죠. 영화도 좋지만, 뮤지컬도 나름의 뛰어난 매력을 가진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작품입니다. 기대감을 갖고 오셔도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이비와의 인터뷰를 마쳤다. 아이비가 에스더로 출연하는 뮤지컬 벤허는 10월29일까지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막을 올린다. 아이비는 이미 차기작도 정해져 있다. 일본 영화로도 유명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주인공 마츠코 역을 맡았다. 하루를 48시간처럼 쪼개 쓰고 있다.

아이비와의 인터뷰는 이제 다음 생에서나 해야 하는 걸지도.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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