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인터뷰] ‘야구소녀’ 이주영 “성별이 아닌 내 자신을 뛰어넘는 게 중요해”
‘이태원 클라쓰’를 위해 머리를 과감히 탈색했던 이주영은 다시 검은 머리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는 트레이드마크가 돼버린 숏커트 머리는 그대로였다. 그는 “머리를 길러보려고 하면 꼭 짧은 머리를 해야 하는 역할이 와서 ‘밥 잘 사주는 누나’ 이후로는 계속 짧은 머리였다”라며 “팬들도 이젠 다른 스타일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고 나 역시 지겨워서 이젠 좀 길러보고 싶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팬들은 아쉽겠지만(?) 영화 ‘야구 소녀’때도 이주영은 짧은 머리를 유지해야 했다. 고교 야구팀의 유일한 여자이자 시속 130km 강속구로 ‘천재 야구소녀’라는 별명을 지닌 ‘주수인’(이주영 분)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가 연기한 ‘주수인’은 1997년 여성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고등학교 야구부에 입학하고 KBO에서 주최하는 공식 경기에 선발 등판한 최초의 여자 야구선수 ‘안향미’가 모티브가 됐다.
‘야구소녀’에 출연한 계기에 대해 이주영은 “영화 오프닝에 ‘의학적으로 남성이 아닌 자는 부적격 선수’라는 문구가 한국프로야구 협회조항에서 삭제되었다는 문구로 시작되지 않나. 그 사실을 안 후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라며 “이런 조항이 예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국내에 프로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본보기조차 될 수 없었던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내 목소리로 해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야기는 성장 드라마의 정석을 따른다. 프로 야구 선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주인공 수인은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하는 고교 야구 선수다. 아무도 수인이 진짜 프로야구단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수인의 성실함과 열정에 “여자가 무슨 야구야”라고 선입견을 가졌던 새 코치인 진태(이준혁 분)가 마음을 바꾸며 그를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취업이나 하라는 엄마 역시 끝내 딸의 꿈을 응원해주며 해피엔딩을 맞게 된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이다.
이에 대해 이주영은 “우리 누구나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 있고 끝내 (꿈이)이뤄지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럼에도 영화에서만큼은 희망적인 메시지로 풀어보고 싶었다. 주수인이 희망의 캐릭터 이길 바랐다”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 꿈만 이루면 정말 행복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 꿈을 이뤘다고 영원한 ‘꽃길’이 아닌 수많은 벽과 마주친다는 사실을 경험해 본 분들은 알 것 같아요. 그럼에도 진입장벽이 높은 어딘가를 넘은 누군가의 이야기가 보고 듣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비춰졌으면 좋겠어요.”
‘야구 소녀’를 찍기 전까진 이주영은 야구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좋아하는 팀도 없었을뿐더러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야구 전문용어부터 시합운영 등 많은 것을 공부해야 했다. 또한 투수 역할이라 투구 폼부터 공을 던지는 방법, 그러니까 직구, 커브 그리고 수인의 특기인 ‘너클볼’까지 모두 익혀 던져야 했다. 그는 “‘테이블세터’, ‘트라이 아웃’ 등 기본적인 용어부터 야구공을 던지는 법을 배워야 했다”라며 “수인이는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지만 장면을 위해 공을 던지는 모든 방법을 다 익혔다. 특히 너클볼을 익히는 것이 어려웠다. 볼 자체가 회전이 없어야 하고 정교한 제구를 해야 해서 실제로 연습할 때 가장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이어 “제구를 할 때 야구공의 실밥을 쥐어서 던져야 했다. 허리나 팔꿈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손목 스냅과 악력도 중요했다. 그래서 악력기를 계속 쥐고 있었고 아령으로 손목의 힘을 키웠다. 또 그럴 듯한 자세를 위해서는 근력이 뒷받침이 돼야 해서 근력 운동도 많이 했던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연습을 하는 초반에는 이주영은 실력 향상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한 달 정도 연습하니 투구속도는 60~70km가 나왔다. 비록 프로선수가 되기 원하는 역할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한 속도지만 하면 이주영은 하면 할수록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연습할 때는 저 역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몰랐어요. 촬영 전에 감독님께서 대역 배우가 있으니 혹시 잘하지 못해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훈련을 하다 보니 누군가에게 의지하기가 싫더라고요. 물론 대역 배우가 연기를 하면 더 좋은 모습이 나올 수도 있지만 최대한 배역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해내고 싶었어요. 결국 대역을 쓰지 않았죠. 공의 각도는 어느 정도 CG에 의지를 하긴 했어요. (웃음)”
극 중 수인이와 배우 이주영은 닮은 점이 꽤 많다. 남성이 많은 세계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조차 두 사람은 닮았다. 그는 “‘내가 여자라서 시속 134km를 던지는 게 대단한 거냐’라는 대사가 있다. 수인이는 성별이 아닌 프로선수로 가기 위한 장벽을 넘기를 바랐다. 자신을 이겨내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내 자신에게 기준점을 맞추며 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수인’을 연기하며 이주영은 잃어버린 연기 열정도 되찾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살면서 내 고집스러운 면이 수인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지만 연기를 하며 그런 점을 많이 잃었다”라며 “이번 영화로 수인이처럼 밀고 나가는 것이 뚝심과 믿음과 열정을 다시 기억하고 되돌아 볼 수 있게 돼서 좋았다”라고 밝혔다.
21살이라는 나이에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던 이주영은 여러 독립영화에서 활약하며 충무로의 신성이 됐다. 특히 독립영화에서 이주영의 티켓 파워는 어마 무시하며 열성적인 팬 층도 형성됐다. 이후 그는 ‘역도요정 김복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최근 ‘이태원 클라쓰’까지 브라운관에서 활약하기며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다른 배우들보다 뒤늦게 데뷔를 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주영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류’ 혹은 ‘대중문화’ 배우가 되는 단계를 정석대로 밟았다.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는 것은 좋지만 그를 사랑했던 독립영화 팬들에겐 아쉬울 수도 있다. 어쩌면 그를 더 이상 독립영화에선 볼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주영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독립 영화를 이 정도 했으니까 이젠 대중매체에만 집중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독립 영화도 언제든지 할 수 있고 대중매체도 좋은 기회만 있다면 언제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스스로 앞길을 규정하며 작품을 선택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예상이라는 것은 항상 빗나가기 마련이더라”고 말했다.
“보는 분들 입장에서는 제가 성장했고 달라졌다고 느끼실 수도 있지만 저는 항상 같은 마음으로 연기를 해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크기 등이 제 연기 생활에 큰 영향은 없었고 그런 마음이 제 배우생활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여전히 제게 연기는 탐구 대상이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더 여러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지금까지의 연기 생활이 저를 만들었듯 계속 성장하는 제 모습이 기대가 됩니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