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잔 다르크’에서 열연하고 있는 제이민.     사진제공 | HJ컬쳐

뮤지컬 ‘잔 다르크’에서 열연하고 있는 제이민. 사진제공 | HJ컬쳐




조명이 켜지면 무대의 무게는 온전히 배우의 어깨로 떨어진다.
1인극의 고독을 관객과 나누며 새로운 길을 찾은 배우, 제이민.
트라이아웃 무대 위에서 그는 잔 다르크와 카바레티스트를 동시에 살아냈다.
그리고 이제, 본공연이라는 더 큰 전장을 향해 깃발을 치켜든다.
조명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무대의 무게는 오롯이 배우의 어깨 위에 얹힌다. 연습 때 신처럼 군림하던 연출가도, 음표 하나를 두고 깐깐하게 굴던 음악감독도, 밤새워 포스터를 만들고 보도자료를 썼던 스태프들도, 커피차를 보내 응원하던 팬들도 그 무게를 감히 나누어 질 수 없다.

혼자서 이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1인극은 오죽할까. 1인극을 볼 때마다 ‘배우가 참으로 고독하겠구나’ 싶어진다. 그들은 무대에 오르기 10분 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대에 오르면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많았어요. 특히 관객을 처음 만나고, 제가 그 공간에 좀 더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혼자서 모든 걸 이끌어 가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이 많이 되었죠.”


제이민은 뮤지컬 ‘잔 다르크’의 배우다. ‘주인공’이란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이 작품이 주연, 조연에 단역까지 모두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1인극이기 때문이다. 그는 “첫 번째, 두 번째 공연 때까지는 얼어붙는 듯한 긴장감에 숨 고르기도 바빴는데, 이젠 10분 전에 밴드 멤버들, 스태프들과 ‘파이팅’을 외치며 기쁜 마음으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배우와 무대의 ‘무게’를 함께 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독감’은 나눌 수 있었다. 제이민은 “무대에서의 호흡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관객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뮤지컬 ‘잔 다르크’는 트라이아웃 작품이다. 본공연을 앞두고 관객 앞에 내놓는 마지막 시험판이라 할 수 있다. 제이민은 “본공연 때 10~20%가 바뀔 수도 있고 80~90%가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시도’라는 건 그만큼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이라며 “리딩 쇼케이스 때부터 창작진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촘촘한 바느질 과정을 함께 해왔다. 트라이아웃에 와서는 다른 배우들의 호흡을 받아들이는 데 집중했다”고 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역사적 인물을 무대 위로 불러올리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무대 위에 펼쳐놓은 카바레라는 공간을 토론의 장으로 바꾸고 관객과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소통한다. 이 작품의 유일한 배우는 카바레의 주인인 ‘카바레티스트’이자 잔 다르크이며 이 밖에 코숑 주교, 샤를 7세, 재판기록관 만숑이기도 하다.

제이민이 바라본 잔 다르크는 우리가 기억하는 비극적 영웅상과는 다른 것 같다. 그는 잔 다르크를 “자신의 마음속 목소리를 따라 살아간 사람”이라 정의를 내리며, 이를 오늘날의 현실과 연결했다. “SNS나 유튜브를 통해 어마어마한 정보를 접하며 살지만 옳고 그름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경우가 많죠. 이런 때일수록 스스로의 기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이민이 걸어온 길을 조금 되돌아가 보자. 그는 원래 가수 출신이다. ‘제이민’이란 이름은 본명 ‘오지민’에서 가져왔다. 2000년대 초 SM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활동했다. 회사 특성상 댄스 트레이닝도 받았지만 노래가 하고 싶어 댄스 대신 기타를 배웠다고 한다. 한국보다 먼저 일본에서 데뷔했다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일본 니혼대를 다녔고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아 일본어와 영어에 능숙하다.

뮤지컬 무대에 처음 선 것은 2012년 ‘잭 더 리퍼’. 이후 가수와 배우 생활을 병행하다 2016년 ‘헤드윅’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뮤지컬 배우의 길을 걸었다. 영어실력을 발휘해 마이클 리와 ‘헤드윅’ 영어버전 공연을 하기도 했다.

알려져 있듯 제이민은 1980년대 중반, 히트곡 ‘그것은 인생’으로 유명했던 가수 최혜영 씨의 딸이다. 최혜영 씨의 모친도 가수였다고 하니, 노래는 3대를 이어온 ‘가업’인 셈이다.
이런 로열 DNA 덕분인지 제이민은 무대에서 ‘잘 놀고, 잘 스며드는’ 가수이자 배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예인 출신 무대배우들에게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특유의 기름기가 없다.

“이 작품은 ‘내가 카바레티스트다’라고 선언하고 시작하는 만큼 부담이 클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더욱더, 저의 이야기가 관객분들의 마음속 깊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무대입니다.”

끔찍한 화형대의 불길 위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잔 다르크. 제이민의 잔 다르크는 무대에서 하나의 거대한 횃불처럼 밝게 타올랐다. 이제 제이민은 트라이아웃을 지나 본공연이란 새로운 전장을 향해 힘차게 깃발을 치켜들었다. 되도록 빨리, 그의 카바레에 다시 초대되고 싶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