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진선규는 대본을 보지 않고 제목을 듣자마자 서울예술단 가무극 ‘나빌레라’ 출연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우연히 이웃의 추천으로 보게 된 동명 웹툰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언젠간 이 작품이 영화든 공연이든 다른 장르로 만들어진다면 꼭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이 통한 걸까. 작년 초에 ‘나빌레라’ 대본이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5월 1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되는 ‘나빌레라’는 일흔살에 발레에 도전하는 노인과 부상으로 꿈에서 방황하는 스물셋 청춘 채록이 발레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우정을 쌓아가는 따뜻한 이야기로 1년이 넘는 연재 기간 내내 다음웹툰 ‘연재 랭킹 1위’, ‘독자 평점 1위’를 유지한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서울예술단의 색을 입힌 2019년 기대작이다.
진선규가 맡은 ‘덕출’은 인생의 황혼기에 ‘발레’를 배우겠다고 하는 할아버지다. 일흔에 친구의 죽음을 마주하며 마음 한편에 놔뒀던 ‘발레리노’의 꿈을 펼치기로 결심한 것. 가족의 반대, 세상의 편견, 물리적인 나이가 그의 발목을 잡지만 나비처럼 날아오르기로 마음을 먹는다. 진선규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면 된다’라는 덕출의 가치관이 자신의 마음과 매우 흡사했다고 말했다.
“‘넌 아직 늙지 않았고 재능도 충분해. 지금처럼 행복하면 된다’는 덕출의 대사가 마치 제게 하는 말 같았어요. 저 역시 이런 격려를 들으며 배우로 살아왔고 후배들에게도 늘 해주는 말이에요. 저 역시 늦게 이름을 알리게 됐잖아요. 그런데 잘 되는 상대방을 비교하면서 살았더라면 행복하게 연기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네가 즐겁고 행복하면 된다. 어느 누구랑 비교할 것 없이 넌 너만의 길을 가면 돼’라고 말하고 있어요. 70세에도 제가 이런 마음을 간직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진선규는 이 역을 맡으며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발레’였다. 자세나 몸의 선이 중요한 움직임이라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다행히 덕출은 70세에 발레를 시작한 사람이다. 그래서 꾸준히 연습하면 어느 정도 극 중 덕출의 실력과 맞아떨어질 것”이라며 “발레 덕분에 몸이 건강해지고 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발레를 정식으로 배우는 것이 처음이라 열심히 하고 있어요. 힘들지만 재미있어요. 코어 근육을 쓰고 안쪽 근육, 등 근육을 많이 쓰기 때문에 자세도 좋아지고 건강해지고 있어요. 아마 채록 역 배우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거예요. 프로 발레리노 역할이니까요. (웃음)”
또 그는 뮤지컬 무대를 서면서 가장 많은 넘버를 소화하게 됐다고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뮤지컬 발성 레슨’을 많이 받았으면 좋았겠다는 후회를 많이 하고 있다. 그러면 지금처럼 걱정을 하진 않았을 건데”라면서 “지금 목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올려놓기 위해 도라지청 등을 먹으며 연습하고 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 70세가 돼서 어떤 것을 못하면 후회가 되겠냐고 묻자 진선규는 ‘복싱과 ’멜로‘를 꼽았다. 복싱은 지금 배우고 있다는 그는 “멜로를 못하면 엄청 후회할 것 같다”라며 “달콤한 멜로 보다는 ‘파이란’ 같은 멜로를 해보고 싶다. 루저가 갱생되는, 거듭나고 변화되는 그런 멜로를 꿈꾸고 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덕출은 늦은 나이에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슬럼프에 빠진 발레리노 ‘채록’을 격려하기도 한다. 50세 가량 나이 차가 나지만 서로를 향한 이해와 동료애는 세대 간의 차이를 넘어선 진실한 우정에 가까워진다. 그는 “마음을 열어두는 자세가 중요한 것 같다”라며 “채록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가 겪은 힘든 과정을 같이 이해하고 인정하니 친구가 될 수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연극 ‘신인류의 백분토론’을 할 때 뇌과학 공부를 많이 했어요. 자기가 겪어온 상황과 잣대에 뇌의 인식 작용이 멈춰버린 사람을 일명 ‘꼰대’라고 한다고 해요. 더 이상 남의 것이나 새롭게 받아들이거나 배려하지 않고 내 행동과 말은 무조건 맞는다고 생각한대요. ‘덕출’은 그런 틀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에 70세가 된 자신에게도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서로의 연기를 공유하고 이해하며 또 다른 연기를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렇다면 진선규에게 ‘덕출’과도 같은 존재가 있었을까. 그는 단번에 “아내 보경이와 민준호(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대표)다. 그는 ”아내와 친구들이 격려를 많이 해줬다“라며 ”친구들은 ‘선규야, 걱정하지마. 넌 잘 될 거야’라고 늘 말해줬고 아내는 ‘돈 더 받는 거 해서 뭐해.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해’라고 한다“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영화 ‘범죄도시’로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후 ‘극한직업’으로 ‘천만배우’ 타이틀을 거머쥔 진선규는 충무로 대세가 됐다. 이미 ‘롱 리브 더 킹’과 ‘암전’, 그리고 넷플릭스 ‘킹덤’ 촬영을 끝냈다. ‘나빌레라’ 공연을 마치면 ‘승리호’(가제) 촬영에 들어간다. 누구보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지만 틈틈이 자신의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지방 공연은 틈틈이 참여하고 있다.
그는 “극단이 영세하다 보니 생활비를 축적하는데 도움이 된다.(웃음) 극단 후배들에겐 공연을 하며 용돈을 벌 수도 있으니 공연이 잡히면 여건이 되는 한 무조건 한다”라며 “요즘은 내가 출연을 하면 초청하겠다는 극장이 있어서 무조건 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무대를 계속 서는 이유는 너무 단순해요. 수업을 마치거나 일을 마치고 엄마, 아빠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랄까요. 영화나 드라마 현장으로 출근했다가 무대가 있는 공연장으로 가면 집처럼 편해요. 영화에서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공연으로 돌아왔다’는 표현이 많이 보이지만 지난달에도 공연을 했기 때문에 ‘컴백’이라는 기분은 들지 않아요.(웃음) 공연장은 언제나 제 집일 테니까요.”
이 공연을 보는 관객들에게 “꿈을 갖고, 이를 위해 행동하는 것은 나이와 큰 관계가 없다. 꿈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고 이 마음을 갖고 있다면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전해드리고 싶다”라며 “또 혼자 아닌 함께 나가면 더 희망찰 것”이라고 전한 진선규는 자신 역시 일의 흥망성쇠를 떠나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배우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천천히 나아가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빌레라’에 ‘사람은 자기가 초라하다고 느끼는 순간 초라해진다’라는 대사가 있거든요. 누군가가 갑자기 잘되는데 나는 3만원 받으며 공연을 하는 게 결코 초라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누군가와 비교하는 순간 꿈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결과물이 좋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그 자체로 전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내 길을 만들어가는 것, 무너지지 않게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서울예술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