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인메모리]프로야구명수비수서중소기업사장님으로허준

입력 2008-12-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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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울 때일수록 사람이 그립습니다. 옛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스포츠동아는 스토브리그 동안 팬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추억 속의 스타를 찾아가는 ‘피플 인 메모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은퇴 후 스포츠계에 몸담고 있지 않아 이름마저 가물가물해지는 ‘왕년의 선수’. 그들이 개척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인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2000년 9시 뉴스가 끝나면 국민의 절반이 TV 앞에 모였다. 드라마 ‘허준’을 보기 위해서였다. 드라마 허준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던 그 시절 한화 허준도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저자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이전까지는 그가 안타를 치거나 홈런을 쳐도 시큰둥하던 언론도 대접이 달라졌다. 결정적인 적시타 한방이 나오면 ‘만병통치 허준’ 등 기발한 패러디 제목을 큼지막하게 뽑기도 했다. 현역 시절 알토란 같은 수비솜씨와 성실한 플레이로 ‘약방의 감초’ 같은 활약을 펼친 허준. 1993년 데뷔해 2004년을 끝으로 12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한 뒤 사업가로 변신했다. 부산지역의 뷔페 시장에서 손꼽힐 정도로 대단한 사업수완을 발휘하고 있는 ‘더 파티(THE PARTY)’의 대표 허준(38)을 만났다. ○첫타석부터 대박, 3연타석 홈런 노린다 부산시청 옆 국민연금관리공단 부산회관 빌딩. 유니폼을 입은 허준만 기억하던 기자에게는 말쑥한 정장차림의 그가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장님 태가 났다. 레스토랑 입구에 들어서자 손님들로 가득 찬 게 보였다. 드라마 허준에서 명품조연 임현식이 환자들에게 “줄을 서시오∼”라고 외치는 대사가 떠오를 정도. 말그대로 문전성시였다. 송년회와 동창회까지 겹친 연말 저녁 시간대여서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는 2004년 11월 은퇴한 뒤 이듬해 4월 해운대의 리베라호텔에서 웨딩뷔페를 시작했다. 야구 외엔 문외한이던 그였지만 사업의 첫 타석부터 히트를 쳤다. 부산에서 예식사업으로 성공하고 있는 손위처남의 도움을 많이 받은 덕분이다. 사업은 확장일로에 있다. 현재 국민연금관리공단 빌딩 4개층을 사용하고 있고, 2008년 2호점을 낸 범일동 누리엔 빌딩에도 3개층을 THE PARTY로 사용할 정도다. 지금까지는 결혼 피로연이나 돌잔치 위주로 사업했지만 내년 4월 해운대에 ‘팔레드시즈’라는 레스토랑을 오픈할 예정이다. 가족단위로 서너명이 식사를 즐길 수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과연 사업을 확장해야 하느냐 싶어 고민도 많았어요. 그런데 사업이란 게 묘하더라고요. 멈출 수가 없어요. 좋은 위치에 좋은 자리가 보이면 욕심이 나요. 사업하는 사람들이 확장을 하려는 게 이젠 이해가 가요.” ○직원 200명 거느린 중소기업 사장님 그는 프로야구 선수생활을 하면서 KIA에서 은퇴하던 2004년 6000만원을 받은 것이 최고연봉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억대 연봉선수가 부럽지 않은 사장님이 됐다. “솔직히 얼마 정도 버느냐”는 질문에 그는 빙그레 웃으며 “프로야구 선수 때보다 잘 벌고 있다”고만 했다. 그를 잘 아는 주위사람들은 “크게 성공했다”며 입을 모으고 있다. 지금은 일용직까지 합쳐 200명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그야말로 중소기업 사장님. 현재는 경기가 좋지 않아 미루고 있지만 언젠가는 유통업에도 뛰어들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다. 자신의 유통회사에서 식자재를 납품하면 그만큼 차익이 발생하기 때문이란다. 처음에는 고생길이었다. 식자재 하나에 따라 음식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고 1년 동안 부전시장을 비롯해 새벽시장 바닥을 훑고 다녔다. 자존심을 버리고 구매경험이 있는 사람을 귀찮게 따라다녔다. 오전 10시에 출근해 밤 10시 마감. 정리하면 12시였고, 집에 들어가면 날짜는 바뀌었다. 말그대로 집에서는 새우잠만 자고 나오는 생활의 반복.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한달은 어느새 지나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365일 중 설과 추석 명절에만 쉰다. “처음엔 거래처를 뚫는 것도 쉽지 않더라고요. 나이도 젊은 놈이 뷔페한다니까 다들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고. ‘부산말도 잘 못하면서 무슨 뷔페한다고 그라노?’라면서 퇴짜를 놓는 분도 계셨죠. 나중엔 오기가 생기고 요령도 붙더라고요.” 그는 최근에도 서울뿐만 아니라 일본과 홍콩 등지를 돌아다니며 벤치마킹을 하고 있다. 인테리어도 둘러보고, 새로운 음식세팅법도 참고하고 있다. 사업은 만족하는 순간 망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확실히 부산 사람들 야구 좋아해요 그는 부산에 살면서 부산의 야구에 대한 유별난 사랑을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야구선수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 롯데 선수 사인볼 부탁도 수없이 받았단다. “제가 선수시절 스타플레이어도 아니었지만 부산사람들은 저를 알아봐요. 우리 직원들도 야구 굉장히 좋아하죠. 주방이나 홀에 있는 직원들은 일하면서도 야구만 하면 컴퓨터나 라디오로 롯데 경기를 파악해요. 롯데가 지면 하던 일도 멈추고 자기들끼리 화를 내고 성질을 내고 그래요. 홀 책임자가 처음 저를 보더니 ‘당신 싫어해요. 다른 팀하고 할 때는 못하다가 롯데하고 할 때 왜 그리 잘 했냐’고 따지더라고요. 아픈 적시타를 몇 번 쳤는지 모르지만 제 기억에는 롯데전이라고 그렇게 잘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허허.” 롯데 코치나 선수들도 이곳에 자주 온다. 손민한 최기문 이용훈 임경완이 자녀 돌잔치를 여기서 치렀고, 박정태 코치 등 2군들이 회식할 때도 이곳을 이용하기도 했다. ○수비로 빛났던 야구선수 허준 공주고 경성대를 나온 그는 93년 신인지명 2차 1번으로 빙그레에 뽑혔다. 당시 계약금 3000만원은 빙그레 역대 야수 중 최고액. 입단 첫해부터 주전 유격수로 입성한 그는 개막 후 3개월 동안 타격 10걸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그는 방망이보다는 수비로 인정받는 선수였다. 스스로도 “수비로 1000경기를 뛰었다”며 웃었다. 98년 외국인선수 제도가 도입되면서 그도 피해자가 됐다. 한화가 3루수인 마이크 부시와 유격수인 조엘 치멜리스를 영입해 설 자리가 줄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정영기 코치를 졸라 2루수 훈련을 받았다. 다른 선수들보다 1시간씩 일찍 야구장에 나와 2루수 훈련을 받으면서 멀티플레이어로 거듭났다. 99년까지 7년간 통산 8홈런에 그쳤던 그는 드라마 허준이 히트를 칠 때인 2000년에만 홈런 6방을 몰아치는 신바람을 냈다. “드라마 때문에 인터뷰도 많이 했죠. 팬들은 홈페이지까지 만들어주셨고, 홍보팀에서는 제가 타석에 들어설 때 허준 드라마 주제곡을 내보내기도 했어요.” 2003년 시즌 중반 현금 300만원에 KIA로 트레이드된 뒤 2004년 은퇴했다. 12년 통산 1001경기, 2151타수, 474안타, 타율 0.220.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 이젠 주위도 둘러봐야죠 그에게 인생의 스승은 야구였다. 사업을 하면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만 운동할 때의 인내심과 정신력이면 못할 게 없다고 자신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 어린시절에 새벽부터 나가서 밤늦도록 운동했잖아요. 그런 정신력만 있으면 되는 것 같아요. 야구선수 출신이라서 플러스 되는 부분도 많아요. 우직하고 성실한 이미지로 봐 주시더라고요. 저도 머리로 사람을 만나지는 않죠. 사회에 나보다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 얼마나 많아요. 머리회전해서 만나봤자 어떻게 이기겠어요. 야구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저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 신인 때 목표가 1000경기와 1000안타였는데 1000경기는 뛰었으니 반은 성공했죠. 그래서 후회는 없어요. 사회에서도 ‘후회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뛰고 있죠.” 그는 두 달에 한번씩 고아원 어린이 50여명을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배불리 먹고 나가는 걸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단다. 앞으로도 불우한 이웃들에게 더 눈길을 돌리고 싶다고 했다. 현역 시절부터 ‘심성이 착한 선수’라는 평을 듣던 허준이었다. 그는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또다시 도전이다. 통산타율은 멘도사 라인에 걸쳤지만 사업가로 변신한 제2의 인생에서는 역전 만루홈런을 치고 있다. 부산|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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