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영의 ML 타임슬립] 12년 전 김병현·리베라가 꿈꿨던 우에하라의 세리머니

입력 2013-11-1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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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 vs 2001 월드시리즈

메이저리그 2013시즌이 끝났다.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26·LA 다저스)과 ‘추추 트레인’ 추신수(31·전 신시내티)의 맹활약 덕분에 한국 팬들에게는 더 뜻 깊은 한해였다. 류현진이 ‘코리안 특급’ 박찬호에 대한 기억을 다시 불러왔듯,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는 유독 과거의 명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과 인물이 많았다. 스포츠동아는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모아 그때 그 추억 속으로 되돌아가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손건영 통신원이 전하는 ‘ML 타임슬립(Time Slip)’이다.


보스턴 2013년 WS 우승 일등공신 우에하라
PS 16경기 13차례 등판 1이닝 이상도 4차례

2001년 WS 4·5차전 홈런에 무너진 김병현
양키스 리베라도 7차전 끝내기안타 희생양

쉽지 않은 마무리…우에하라가 대단한 이유

2013년 월드시리즈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우승으로 끝났다. 내셔널리그 챔피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대결에서 타율 0.688, 2홈런, 6타점, 7득점, 8볼넷을 기록한 ‘빅파피’ 데이비드 오티스가 월드시리즈 최우수선수(MVP)를 거머쥐었지만 일본인 마무리투수 우에하라 고지의 뛰어난 활약이 없었더라면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 정상 탈환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우에하라는 13.2이닝 동안 단 1점만 허용하며 방어율 0.66으로 레드삭스의 수호신이 됐다. 레드삭스가 치른 포스트시즌 16경기 동안 13차례나 마운드에 오른 그가 1이닝 이상을 책임진 것은 4차례였다. 특히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 5차전에선 4-3으로 앞선 8회말 1사 후 등판해 탈삼진 2개를 곁들여 아웃카운트 5개를 잡아내기도 했다.

시계바늘을 12년 전으로 돌려보자. 2001년 월드시리즈에선 4년 연속 우승에 도전한 뉴욕 양키스와 창단 4년차에 불과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격돌했다. 이 시리즈는 1991년과 1997년에 이어 또 한번 홈팀이 모두 승리를 따내는 기록을 남기며 다이아몬드백스의 4승3패 극적인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 다이아몬드백스의 마무리는 22세의 신예 김병현이었다. 시즌 도중 셋업맨에서 마무리로 승격된 김병현은 19세이브를 거뒀다. 김병현은 디비전시리즈와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도 무실점의 철벽투로 3세이브를 챙겨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뱅크원볼파크에서 열린 1·2차전에선 메이저리그 최강의 원투펀치 커트 실링-랜디 존슨을 앞세운 다이아몬드백스가 완승을 거뒀다. 1차전에선 실링이 7이닝 1실점으로 양키스 타선을 무력화시키는 사이 루이스 곤살레스의 2점홈런 등 장단 10안타가 이어져 다이아몬드백스가 9-1로 승리했다. 2차전은 ‘빅유닛’ 존슨의 독무대였다. 9회까지 고작 3안타만 내주며 4-0 완봉승을 따냈다. 최근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으로 부임한 3루수 맷 윌리엄스는 1-0의 아슬아슬한 리드가 이어지던 7회말 양키스 선발 앤디 페티트로부터 통렬한 3점홈런을 빼앗아 존슨의 어깨를 가볍게 해줬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시구자로 나선 3차전에선 양키스가 2-1로 승리하며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양키스의 39세의 노장 선발 로저 클레멘스가 7이닝 1실점으로 호투한 가운데 6회말 스콧 브로셔스의 결승타가 터졌다. 조 토리 양키스 감독은 8회초부터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를 마운드에 올리는 승부수를 띄웠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팬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4차전에서 봅 브렌리 다이아몬드백스 감독은 3일을 쉰 실링을 선발로 내세웠다. 실링은 3회말 셰인 스펜서에게 솔로홈런을 맞았을 뿐 7이닝 1실점으로 기대에 부응했다. 1-1로 맞선 8회초 이루비엘 두라소의 적시 2루타 등으로 2점을 뽑아내 승부의 추는 다이아몬드백스 쪽으로 확연히 기울었다. 전날 리베라의 2이닝 세이브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 브렌리 감독은 김병현을 역시 8회말부터 등판시키는 초강수를 띄웠다. 김병현이 8회말 3명의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자, 브렌리 감독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9회말 1사 1루서 김병현은 강타자 버니 윌리엄스를 삼진으로 잡아내 양키스타디움을 침묵에 빠뜨렸다. 아웃카운트 1개만 보태면 대망의 월드시리즈 첫 세이브를 신고하는 역사적 순간이 찾아왔지만, 운명의 여신은 김병현을 외면했다.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던진 김병현의 초구에 티노 마르티네스의 방망이가 예리한 타구음을 내며 날카롭게 돌았다. 우중간 담장을 넘어가는 동점 2점홈런이 터진 것이다. 그러나 브렌리 감독은 김병현을 강판시키지 않았다. 연장 10회에도 김병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아무리 불펜에 믿을 만한 투수가 부족하다지만, 마무리를 3이닝 연속 등판시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결국 김병현에 대한 브렌리 감독의 지나친 신뢰는 화가 되어 돌아왔다. 10회말 데릭 지터는 풀카운트 접전 끝에 김병현의 바깥쪽 공을 밀어 쳐 우측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홈런을 터뜨렸다.

바로 다음날 열린 5차전에서 다이아몬드백스는 선발 미겔 바티스타의 7.2이닝 무실점 깜짝 호투와 스티브 핀리-로드 바라하스의 솔로홈런에 힘입어 2-0으로 앞서나갔다. 운명의 9회말, 브렌리 감독은 다시 김병현을 호출했다. 첫 타자 호르헤 포사다에게 2루타를 맞아 불안한 출발을 보였지만, 김병현은 두 타자를 연속 범타로 처리해 4차전 블론세이브의 악몽을 씻어내는 듯했다. 그러나 이틀 연속 운명의 여신은 김병현을 외면했다. 브로셔스가 김병현의 2구째를 잡아당겨 좌측 담장을 넘기는 동점 2점아치를 그리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이틀 새 홈런을 3방이나 내준 김병현은 그만 마운드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결국 양키스가 연장 12회말 알폰소 소리아노의 끝내기안타 덕에 3-2 역전승을 거뒀다.

홈으로 돌아온 다이아몬드백스는 6차전에서 무려 22안타를 폭죽처럼 터뜨리며 15-2로 대승을 거뒀다. 페티트를 공략해 3회에만 8점을 뽑아내는 등 일찌감치 승기를 잡은 가운데 선발 존슨은 7이닝 2실점으로 월드시리즈 2승째를 따냈다.

브렌리 감독은 7차전 선발로 실링을 내세웠다. 포스트시즌까지 합쳐 정확히 300이닝을 던졌지만, 실링은 또 다시 3일 휴식만 취하고 마운드에 올라 클레멘스와 팽팽한 투수전을 펼쳤다. 6회말 대니 바티스타의 적시타로 다이아몬드백스가 리드를 잡았지만, 양키스는 7회초 마르티네스의 적시타로 1-1 동점을 만들었다. 브렌리 감독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실링에게 8회에도 마운드를 계속 맡겼으나, 소리아노에게 솔로홈런을 허용해 패색이 짙어졌다. 브렌리 감독은 8회초 1사 후 바티스타를 등판시켜 지터를 잡아낸 뒤 6차전에서 104개의 공을 던진 존슨을 김병현 대신 마운드에 올려 남은 아웃카운트 4개를 책임지게 했다.

한편 2-1의 리드를 잡자, 토리 감독은 3차전과 마찬가지로 리베라를 8회부터 등판시켰다. 3명의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솎아낸 리베라의 포스트시즌 방어율은 0.70까지 낮아졌다. 양키스의 4년 연속 우승이 기정사실처럼 여겨진 순간, 다이아몬드백스는 9회말 토니 워맥의 동점 2루타와 이어진 1사 만루서 곤살레스의 빗맞은 타구가 유격수 지터의 키를 살짝 넘기는 끝내기안타가 돼 3-2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22세의 겁 없는 청년 김병현에게도,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 세이브의 주인공 리베라에게도 2이닝 세이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교훈을 남긴 채 2001년 월드시리즈의 각본 없는 드라마는 종막을 고했다.

스포츠동아 미국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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