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기 KBL 총재 “트라이아웃, 대기업 출혈 경쟁 때문에 시작”

입력 2017-08-01 05:45: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프로농구는 출범 때부터 트라이아웃 제도를 통해 외국인선수를 선발해왔다. 출범당시 전무이사로 있었던 KBL 김영기 총재는“무분별한 스카우트 경쟁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이유를 밝혔다. 사진제공 | KBL

■ 김영기 KBL 총재가 말하는 트라이아웃 도입 뒷이야기

“당시 선수 영입에 엄청난 돈 쓰던 때라
자유계약 하면 더 심해지겠다 싶었지
이젠 시대에 맞지 않는 방식인 건 사실”


국내 프로농구(이하 KBL)는 트라이아웃과 드래프트를 통해 외국인선수를 선발한다. 1997년 출범해 22번째 시즌을 앞둔 KBL은 올해까지 17번의 트라이아웃&드래프트를 실시했다. 자유계약제도를 택했던 시즌은 단 4차례(2004∼2005, 2005∼2006, 2006∼2007, 2011∼2012) 뿐이다.

사진제공|KBL



● 왜 시작부터 트라이아웃이었나

KBL은 프로출범과 함께 외국인선수 제도를 도입했다. 국내선수들만 뛰던 농구대잔치의 틀에서 벗어나 외국인선수의 화려한 플레이를 통해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팀 간 전력 평준화를 이루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KBL 원년 외국인선수 드래프트는 1996년 11월 미국 LA에서 열렸다. 김영기(81) KBL총재는 당시 전무이사로 프로출범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농구대잔치 시절에는 실업팀들이 선수영입을 위해 수억 원의 돈을 들였다. 당시에는 대기업들이 농구에 경쟁적으로 엄청난 돈을 썼다. 외국인선수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하면 더 심해지지 않겠나 싶어서 공영제(트라이아웃)로 하자는 데에 뜻을 모았다”고 제도 도입의 이유를 밝혔다.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KBL은 트라이아웃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출범 때와 달리 이제는 각 구단의 스카우트 방식에도 틀이 잡혔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트라이아웃에서 탈피해 자유계약으로 돌아서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도 높다. 전 세계 농구리그 가운데 트라이아웃과 드래프트로 외국인선수를 선발하는 리그는 KBL뿐이다. 참고로 NBA와 G리그는 국내·외국인선수 구분이 없다.

김 총재는 “2년 전(2015년) 트라이아웃을 할 때 로이터에서 취재를 왔다. 아직도 이런 방식으로 외국인선수 선발을 하는 리그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방식인건 사실이다. 선수 교체 때 트라이아웃 참가자 틀 안에서 대체자원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비용도 많이 든다. 라스베이거스에서 트라이아웃 한 번 하는데 약 7억원이 든다.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고 있다. 여자농구(WKBL)처럼 트라이아웃은 폐지하고 국내에서 드래프트만 하는 방법도 고려 중이다”고 했다.

사진제공|KBL



● 초창기 트라이아웃 해프닝은?

KBL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드래프트는 원년 LA를 시작으로 이듬해 시카고에서 펼쳐졌고 2007년부터 현재의 라스베이거스로 고정됐다. 프로출범 초기 때만해도 국내 프로농구는 물론이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인지도 자체가 높지 않았다. 외국인선수들에게는 고작 ‘88올림픽을 개최한 나라’ 정도였다. 김 총재는 “출범 2년째부터는 트라이아웃을 시카고에서 했다. 동부 쪽에 농구를 잘하는 대학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KBL의 인지도가 낮아 참가 선수들의 질문이 많이 들어왔다. ‘한국에 고속도로는 있느냐, 기차는 있느냐, 전쟁이 나지는 않느냐’는 질문이 많았다. 심지어 ‘피자를 먹을 수 있느냐’는 질문도 있었다. 선수보다 선수 가족들이 더 걱정을 했다. 그들에게는 낯선 나라였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며 껄껄 웃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발달하고 외국인선수 영상을 분석할 프로그램도 있지만, 프로초창기 때는 정보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에이전트가 보내준 비디오 영상만 믿고 선수 선발을 했다가 낭패를 본 팀들도 있었다. A구단의 관계자는 “그 때는 선수 영상을 구하기 어려웠다. 에이전트들이 VHS테이프를 줬는데 대부분이 그 선수의 인생경기 영상을 보내기 때문에 속는 사례도 많았다. 영상만 보면 모두가 마이클 조단이었다. 그래서 많은 구단이 미국 현지에서 스카우트를 도와주는 어드바이저를 두기 시작했다”고 기억했다. 또 다른 구단관계자는 “출범 두 번째 시즌(1997∼1998시즌)에 조니 맥도웰이 등장해 리그를 평정했다. 각 구단은 맥도웰에 대적할 선수를 찾는 데 혈안이 됐다. 그 때 자신의 이력서에 ‘나는 맥도웰을 막을 수 있다(I can stop Mcdowell)’고 쓴 선수도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지욱 기자 stop@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