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K리그 명장들의 첫승과 초짜 감독들의 데뷔승

입력 2018-03-21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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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감독 부임 초창기 시절인 지난 2006년, 전지훈련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최강희 감독. 사진제공|전북현대

누구에게나 첫 걸음은 힘들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처음 접하는 낯선 일에는 서툴기 마련이다. 물론 천부적인 능력에 행운까지 따라주는 드문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경험이 쌓여야 시야도 넓어지고 여유도 생긴다.

월드컵 무대에 처음 출전한 어느 감독은 본선 1차전에서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며 어떻게 90분이 지나갔는지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또 어떤 코치는 월드컵 무대는 선수 때와는 완전히 딴판으로, 긴장을 너무 해 상대 전술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며 혀를 찼다. 이처럼 큰 무대일수록 첫 경험의 인상은 더 강렬하다.

국내 프로축구 K리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명장들도 데뷔 무대는 녹록치 않았다.

K리그 통산 최다 경기를 치른 지도자는 541경기의 김호 감독이다. 이어 김정남(537경기) 박종환(420경기) 최강희(410경기) 이회택(398경기) 순이다. 이들 중 데뷔 무대에서 승리를 거둔 경우는 김정남 감독이 유일하다. 그만큼 첫 술에 배부른 경우는 드물었다.

김호 전 감독. 스포츠동아DB


한일은행 김호 감독은 1984년 3월 31일 대우전을 통해 데뷔전을 가졌는데, 대우 유태목에게 2골을 허용하며 졌다. 이어 유공전도 패하고, 현대와 비긴 뒤 4차전인 럭키금성과의 홈경기에서 왕선재의 2골과 최덕주의 1골을 묶어 비로소 승리(3-1)를 챙겼다. 첫승을 거둘 때까지 감독의 속은 새까맣게 탔을 것이다. 힘겨운 데뷔 시즌을 보낸 뒤엔 승승장구했다. 김 감독은 한일은행~울산~수원~대전을 거치며 K리그 최고 명장으로 자리매김했고, 2008년 5월 11일 부산을 상대로 승리하며 K리그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200승 고지를 밟았다.

김정남 전 감독.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선수 시절 김호와 함께 국가대표팀의 철벽 수비를 과시했던 김정남은 1985년 여름 사령탑에 올랐다. 전임 이종환 감독이 이끌던 유공은 그 해 5월 17일부터 7월 13일까지 8경기 연속 무승(4무4패)으로 긴 슬럼프에 빠졌다. 팀은 뒤숭숭했고, 감독 자리는 위태로웠다. 이 감독은 7월 18일 포항전을 이긴 뒤 물러났다. 코치였던 김정남이 바통을 이어받았는데, 감독 데뷔전인 8월 24일 할렐루야와 홈경기에서 백현영(2골) 한영수 김용세 문민호(이상 1골)의 릴레이골로 5-0 대승을 거뒀다. 김 감독은 잔여 시즌을 3승1무3패로 마쳤는데, 코치 경험이 도움이 됐다. 8시즌을 유공에서 보낸 뒤 울산 현대(2000~2008년)에서 우승하는 등 통산 210승을 기록했다. 현재 역대 통산 최다승 감독이다.

감독으로서 최초의 정규리그 3연패(1993~1995년)를 이룬 일화 박종환 감독은 2번째 경기만인 1989년 4월 1일 럭키금성을 상대로 첫승을 기록했다.

현역 감독으로는 유일하게 최다 경기수 톱5에 오른 최강희 감독의 첫승도 쉽지 않았다. 전임 조윤환 감독이 성적 부진(4승8무12패)으로 물러난 2005년 여름 지휘봉을 잡은 후 포항(0-2패, 8월 24일) 성남(1-5패, 8월 28일) 인천(0-1패, 9월 11일)에 연패 당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혼란스러운 팀을 수습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홈팬의 시선은 차가웠다. 고대하던 첫승은 9월 25일 홈에서 열린 서울전에서 나왔다. 1골1도움을 기록한 윤정환의 활약으로 2-1로 이기며 겨우 고비를 넘겼다. 잔여 시즌 성적은 2승3무4패로 별것 없었지만 연말 FA컵 결승에서 정상에 올랐고, 이듬해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에 출전해 우승하면서 숨겨진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최 감독은 정규리그 최다 우승(5회)을 기록했고, 통산 205승으로 조만간 역대 최다승 기록을 갈아 치울 전망이다. 200승 달성 또한 역대 최단 기간이며, 단일팀에서 이룬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포항에서 지도자생활을 시작한 이회택 감독의 데뷔승도 늦었다. 1987년 4월 19일 럭키금성을 상대로 이겼는데, 무려 5경기 만에 맛본 승리였다.


이들 외에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10년간 뛰며 선수로서 정점을 찍은 뒤 1991년 울산 현대를 맡은 차범근 감독은 첫 3경기에서 2무1패를 거둔 뒤 4경기째인 일화전에서 2-0으로 이기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이후 7경기 동안 5승2무를 하는 등 상승무드를 이어갔고, 결국 데뷔 시즌을 준우승으로 마무리했다.

2008년 부산에서 첫 지휘봉을 잡은 황선홍 감독은 홈에서 열린 첫 경기인 전북전(3월 9일) 승리에 이어 초반 5경기에서 3승1무1패로 휘파람을 불었지만 이후 부진을 거듭하며 14팀 중 12위로 시즌을 마쳤다.

수십 년간 지도자 생활을 하며 자타공인 K리그 명장으로 평가받는 이들도 첫 시즌은 불안과 초조, 떨림의 연속이었다. 첫승은 멀고도 험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버텨낸 덕분에 결국엔 최고 지도자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아산 박동혁 감독-대전 고종수 감독-광주 박진섭 감독-안양 고정운 감독(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사진제공|한국프로축구연맹


2018시즌에도 떨리는 마음으로 데뷔 무대를 갖는 사령탑들이 있다. 대행으로 이미 K리그를 경험한 경우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감독으로서 첫 시즌을 맞는 지도자는 고정운(안양)과 고종수(대전), 박동혁(아산) 박진섭(광주) 등이다. 모두 K리그2 소속이다.

박동혁 감독은 2승1패로 제일 잘 나간다. 개막전인 4일 안산전에서 1-0으로 이기며 첫 경기에서 화려한 신고식을 했다. 그는 “선수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따라줬다”고 했다. 2연승 후 부산전에서 졌다.

고종수 감독은 첫 2경기에서 연패하며 고개 숙였지만 18일 서울이랜드전 승리(1-0)로 감격의 데뷔승을 기록했다. 고 감독은 “하늘이 도와준 승리”라고 했다.

이에 반해 박진섭 감독은 2무1패, 고정운 감독은 1무2패로 아직 승리가 없다. 언제쯤 첫 승을 올릴 지에 관심이 모아지면서 시간이 갈수록 압박감은 더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희비가 시즌 끝까지 가라는 법은 없다.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게 감독의 운명이다. 첫승을 달성한 감독은 여기서 자만하면 안 되고, 첫승에 목마른 감독은 여기서 기죽을 필요가 없다. 겨우 3경기 했을 뿐이다. 비바람 몰아치는 시련 속에서도 200승, 300승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게 바로 데뷔 무대다. 초보 감독들, 힘내시라.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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