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순간] 6. 여자배구 레전드 세터 김사니 “한일전은 끝까지 냉정해야 승산 있다”

입력 2018-10-05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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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자배구 최고의 세터 중 한 명이었던 김사니 현 SBS해설위원은 지난 2012년에 열린 런던올림픽 세계예선 4차전 일본전 승리를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대표팀의 명운이 걸렸던 한일전, 큰 압박감을 견뎌낼 수 있었던 요인은 ‘냉정함’이었다. 사진제공|SBS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스포츠에서도 종목 불문하고 일본전은 어렵다. 현재 실력은 상관없다. 라이벌전은 무조건 이겨야한다. 그래서 부담감이 크다. 현역시절 한국여자배구를 호령했던 김사니(37·SBS해설위원)도 그랬다. 한일전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긴장감으로 점철됐다고 했다.

한국여자배구는 2012년 일본전에서 한번 웃고, 한번 울었다. 런던올림픽 출전티켓이 걸린 최종예선에서는 짜릿한 승리를 거뒀지만, 정작 본선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완패했다. 숙명의 라이벌전은 그렇게 역사에 기록됐다. 당시 대표팀 주장이던 김사니도 6년 전 기억이 또렷하다. 특히 2012년 5월 23일 열린 런던올림픽 세계예선 4차전 일본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된 경기였지만, 최고로 기뻤던 날이었다고 했다.

한국은 객관적인 전력에서 뒤졌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이후 8년 동안 일본 1진에게 22연패를 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장소는 여자배구 열기가 뜨거운 일본 도쿄였다. 1만여 명이 모였다. 또 경기 전까지 예선라운드에서 한국은 1승2패, 일본은 3연승의 상승세였다.

하지만 한국은 주눅 들지 않았다. 초반부터 강하게 밀어붙여 3-1(25-18, 22-25, 25-17, 25-13)로 이겼다. 이날 승리로 2승2패를 기록하며 본선 진출에 청신호를 켰고, 결국 2004년 이후 8년 만에 본선 티켓을 따냈다.

전·후위를 가리지 않고 공격을 퍼부은 김연경(34득점)이 주목을 받았지만 이런 중요한 경기에서는 공격수도 공격수지만 세터의 역할이 막중하다. 볼 배급에 흔들림이 없어야한다. 한국여자배구 세터의 계보를 잇는 김사니도 큰 힘을 보탰다.

김사니는 “우리는 세대교체의 과도기였다. 일본한테 매번 졌다. 경기 전부터 기가 많이 죽곤 했다. 또 그 날은 원정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선수들끼리 약속한 게 냉정하자는 것이었다”고 했다. 한 점, 한 세트 땄다고 좋아할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흥분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는 “침착하게 끝까지 경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게 결국 승리로 이어졌다”면서 “이긴 날 밤 늦게 숙소에 들어갔는데, 선수들끼리 한 말이 ‘진짜 잠을 안 자도 전혀 피곤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기뻤다”고 했다. 한일전은 냉정해야 승산이 있다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프로배구 V리그에서도 그의 발자국은 선명하다. 1999년 도로공사 입단 후 2007년 FA 신분을 얻어 KT&G(현 인삼공사)로 옮겼고, 2010년 흥국생명으로 이적했다. 2012~2013시즌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로코모티브 바쿠로 진출했고, 한 시즌을 뛴 뒤 2014년 기업은행에 둥지를 틀었다. 2016~2017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그는 V리그 최고 세터로 평가 받는다. V리그에서만 세터상 2회와 챔프전 우승 3회, 챔프전 MVP 1회, V리그 10주년 올스타 세터 부문 선정 등의 영광을 안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영광이 따른 건 아니다. 김사니는 “프로생활 초반엔 ‘우승 못하는 세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고 했다. 뛰어난 개인 기량에도 불구하고 2009~2010시즌에야 처음으로 챔프전 우승의 한을 풀었다.

김사니 SBS해설위원이 현역시절인 2014∼2015시즌 최종 우승을 확정지은 뒤 트로피에 입맞춤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김사니


V리그 최고 순간을 꼽아달라는 질문에는 2014~2015시즌을 꼽았다.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기업은행에 입단한 첫 시즌이다. 그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부상을 당하면서 고생했다. 1년 더 있을 수도 있었지만, 내가 거절했다. 나이가 있으니 국내서 1~2년 더 뛴 뒤 은퇴를 잘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시즌 시작하면서 부담이 많았다. 기업은행은 항상 우승하던 팀이고, 좋은 세터가 떠난 빈자리를 메워야했다. 자신감보다는 부담감이 컸다”고 되돌아봤다. 설상가상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릎이 안 좋았다. 또 훈련량이 버거웠다. 그는 “너무 힘들어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팀은 정상에 섰다. 자신은 생애 첫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그는 “운이 좋았다. 김희진, 박정아, 데스티니 등 공격 삼각편대의 활약과 다른 선수들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사실 세터가 MVP 받기가 쉽지 않다. 우승을 할 경우 국내 공격수 또는 외국인 선수에게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은 MVP였다.

2016~2017시즌 우승 반지를 추가한 그는 여자배구 최초의 영구결번(9번) 선수가 됐다. 그는 “뒤늦게 상복이 터졌다. 기업은행에서 내 존재감을 높였다. 마무리도 아름다웠다”고 했다. 또 “배구는 등번호를 많이 쓸 수 없는 종목이다. 기업은행이 창단한 지 얼마 안됐고, 나는 창단멤버도 아니다. 너무 큰 선물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방송해설위원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더 큰 미래를 그리고 있는 듯 했다. 그는 “김연경 스포츠아카데미(판교)에서 지도자를 하고 있다. 4~5개월 정도 됐다. 배구를 몰랐던 성인들을 지도하면서 그 전에는 몰랐던 보람, 또 지도자의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지도자로서 코트에 복귀할 수도 있다. 세터로서 엄마처럼 선수들을 이끌었듯, 지도자로서 선수들을 다독이는 모습도 머지않아 볼 수 있을 듯하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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