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가운데).
1979년 새한자동차 인수와 함께 축구단을 운영한 김 회장은 아주대와 거제고 축구부도 창단해 학원축구 육성에도 깊은 애정을 쏟았다. 1983년 프로축구 K리그 원년 멤버로 참여한 대우로얄즈는 1980~1990년대 최고의 명문 구단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조광래를 비롯해 김주성, 정해원, 정용환, 변병주, 박창선, 안정환 등 내로라하는 국가대표선수들이 즐비했던 대우는 정규리그 4회 우승(1984·1987·1991·1997년)에 빛나는 명실상부 최고의 구단이었다. 1985년 K리그 최초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 1997년 K리그 최초 3관왕 달성 등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1999년 모기업인 대우그룹의 워크아웃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00년 현대산업개발이 축구단을 인수해 부산 아이파크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김 회장은 특히 선수들을 아꼈다고 한다. 조광래 대표는 “회장님은 바쁜 와중에도 시간이 나면 숙소에 들러 선수들과 얘기하는 걸 좋아하셨다. 선수단에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해결해주실 정도로 전폭적으로 지원했다”고 했다. 한 축구인은 “박태준 회장님이 포항제철을 통해 축구에 많은 투자를 하셨다면, 대우의 김 회장님도 그 정도로 축구와 인연이 깊다”고 전했다.
김 회장은 1988년 2월부터 5년간 제45·46대 대한축구협회장으로 일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등 굵직한 대회를 치렀다. 남북축구교류에도 큰 역할을 했다. 평양과 서울을 오간 남북통일축구대회(1990년)를 성공적으로 열었고, 이듬해 남북청소년단일팀을 구성해 제6회 세계청소년선수권(포르투갈)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8강에 올랐다. 또 1991년 대한축구협회 차원에서 처음으로 2002년 월드컵 유치에 필요한 기본 계획 마련을 추진하기도 했다.
‘세계 경영’을 표방한 김 회장은 기업처럼 축구에서도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선 안 된다는 지론이었다. 선진축구를 접목해 한국축구를 성장시켜야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대우는 K리그 최초로 외국인 지도자를 영입했다. 1990년 동독 출신의 엥겔 감독이 대우를 맡아 압박축구로 돌풍을 일으켰다. 엥겔 감독은 체력 측정을 통한 선수 개인별 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91년엔 헝가리 출신의 베르탈란 비츠케이가 대우를 맡아 K리그 정상에 올랐다. 외국인 지도자 최초의 K리그 우승이다. 대한축구협회장 시절엔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일본대표팀을 이끌고 동메달을 땄던 독일 출신의 데트마르 크라머를 올림픽대표팀 총감독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 회장은 한국축구에 도움이 된다면 국적을 따지지 않았다. 조광래 대표는 “기업 경영을 하시면서 유럽을 많이 다니셨는데, 그 곳에서 축구에 대한 이해와 시야를 넓히신 것 같다”고 했다. 이어 그는 “선수들에게도 기회가 된다면 유럽 무대로 많이 진출하라고 당부하셨다. 또 1980년대 중반 유럽에서 지도자 연수를 하던 내게도 선진축구를 많이 배우라고 격려해주셨다”며 고인을 기억했다.
김 회장은 축구가 세계 경영과 가장 어울리는 스포츠라고 여겼을 법하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그의 철학처럼 한국축구도 더 넓은 세계로 진출해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축구를 위해 많은 걸 남기시고 저 세상으로 떠난 고인의 명복을 빈다.
최현길 전문기자·체육학 박사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