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C인삼공사 한송이. 스포츠동아DB
흘러가는 시간은 각자가 처한 상황이나 나이에 따라 체감 스피드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10대는 시속 10km의 느린 속도로, 50대는 시속 50km대의 가속도로 세월이 빨리 지나가는 것을 실감한다는 말이다. 그날 한송이는 자신의 선수생활을 “이제 5세트 10점대에 들어섰다”고 정리했다. 현재 자신이 정확히 어떤 시점에 와 있는지 배구선수답게 센스 있게 표현한 얘기는 귀에 쏙 들어왔다. 그 말에 힌트를 얻어 많은 선수들에게 “지금 당신의 배구인생은 몇 세트인지”를 물었다. 흥미로운 대답이 나왔다.
신인선수들은 물론이고 프로생활 3년차 미만의 선수들은 대부분 “이제 시작”이라고 대답했다. 현대캐피탈의 2년차 세터 이원중은 “이제 1세트 시작”이라고 했다. 그에게 “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을 묻자 “서브”라고 했다. 포지션 특성상 세트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서브를 넣어야하는 세터답게 서브를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다.
대한항공 임동혁. 스포츠동아DB
대한항공의 기대주 임동혁도 “아직 1세트 중”이라고 했다. 많은 기대를 가지고 고졸선수로 V리그에 뛰어든 지 3시즌 째지만 외국인선수에 밀려 아직 OPP 주전자리를 꿰차지 못한 상황을 염두에 둔 듯한 대답이었다. 또 한명의 1세트 출발은 뜻밖에도 V리그 최고령선수 여오현(현대캐피탈)이었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항상 1세트 첫 번째 공을 리시브한다는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플레잉코치 겸 선수로 조카뻘들과 기량을 겨루는 리베로는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선수생활을 이어간다는 의지가 넘쳐났다. 선수로서 언제나 첫 세트의 시작이라는 젊은 마음을 가졌기에 아직 싱싱한 플레이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흥국생명 김세영. 스포츠동아DB
그와 반대의 입장은 흥국생명의 미들블로커 김세영이었다. 올해 첫 아들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학부모가 된 베테랑은 “이제 5세트 듀스”라고 자신의 배구인생을 정리했다. 하지만 김세영의 듀스는 27일 현대건설과의 엄청났던 5세트 경기처럼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아들의 첫 학교생활을 돕기 위해 내심 은퇴를 고려했지만 친정 부모님이 손자를 돌봐주기 위해 상경해주신 덕분에 육아고민을 조금은 덜었다.
KB손해보험 김학민. 스포츠동아DB
한국전력에서 마지막 선수생활을 불꽃을 태우려는 신으뜸과 한때 은퇴를 결심했지만 KB손해보험 권순찬 감독의 러브 콜과 손 편지를 써서 보내는 프런트의 정성에 다시 KB손해보험 유니폼을 입은 김학민은 “이제 경기를 마무리 할 시간”이라고 했다. 신으뜸은 “선수생활을 끝내기 전에 뭔가 마무리를 멋있게 하고 싶다”고 했다. 아직은 동료들이 감탄하는 타고난 점프력과 위기상황에서도 여유가 넘치는 플레이로 후배들의 모범이 되는 김학민도 “끝이 멀지 않은 시점이어서 더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전력 오재성(맨 왼쪽). 스포츠동아DB
기자가 질문했던 많은 선수 가운데 가장 이른 세트는 한국전력 오재성이었다. 그는 “경기 시작 전 웜업 상태”라고 했다. 리베로 최초로 신인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한국전력에 입단해 병역의무를 마친 그는 이번 시즌 14경기만 소화하면 FA선수 자격을 얻는다. 한국전력은 FA로 이적할 경우 보상선수가 없는 오재성의 출전경기수를 조절해 FA자격을 1년 뒤로 늦출 수도 있었지만 페어플레이를 하기로 했다. 장병철 감독도 기량과 몸 상태가 된다면 출전시켜서 의도적으로 FA기회를 막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재성은 새 출발을 상징하는 “경기 전 웜업 상태”라고 했다. 그 속내가 궁금하다.
흥국생명 신연경. 스포츠동아DB
윙 공격수에서 리베로로 전향한 흥국생명 신연경은 “3세트 초반”이라고 했다. 처음 FA선수로 계약을 맺었고 새로운 포지션에서 다시 배구인생을 시작한 것을 의미하는 3세트로 해석된다. 우리카드를 거쳐 KB손해보험에서 새로운 배구인생을 열어가는 박진우는 “이제 첫 세트를 마치고 다음 세트를 시작한다”고 했다. 삼성화재에서 FA선수로 한국전력의 유니폼을 입은 이민욱도 “이제 2세트 시작”이라며 새 출발에 방점을 뒀다. 비록 첫 세트의 결과는 나쁘지만 심기일전해서 다시 출발할 세트라는 기회가 배구에는 있다. 그래서 희망이 있다. 지금 각자의 위치에서 여한이 없도록 꾸준히 준비하다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배구인생 최고의 세트는 온다. V리그 모든 선수들의 최고세트를 응원한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