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토크 ①] 김명수 “김갑수 선배의 길 따라 걷는 듯...감개무량”

배우에게 있어 ‘배역’이란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는 수단일 수 있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통로다. 그래서 배우들은 자신이 어떤 배역을 맡는지, 그 배역의 분량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계산하고 따지게 된다.

배우 김명수도 이런 배우 중 하나다. 신중히 고려한다. 하지만 그 계산이 끝나고 난 뒤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스스로 존재감을 발휘하기 이른다. 최근 MBC ‘군주-가면의 주인’도 그랬고 그의 필모그래피에 쌓여있는 작품들이 다 그러하다. 그 중에서도 김명수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또 그의 존재감을 증명한 것은 KBS 2TV ‘불멸의 이순신’속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이다.

“‘불멸의 이순신’ 때 일본 장수 역을 맡는 것에 대해서 저 역시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과거에는 ‘조선왕조 오백년’ 같은 드라마에서 일본 장수 캐릭터가 종종 등장하긴 했는데 한동안 그런 배역이 없었기 때문이죠. 저도 조선의 장수 역을 하고 싶긴 했었어요. 캐릭터에 접근하기도 쉬우니까요. 하지만 감독님으로부터 와키자카 야스하루 후손들의 이야기를 담은 비디오도 보고 ‘어떤 형태로든 참혹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밀도 있게 전하고 싶다는 취지에 크게 공감해서 그 역할을 수락했죠.”

벌써 13년 전 작품이지만 김명수에게 ‘불멸의 이순신’은 여전히 생생한 기억이다. 전북 부안 바닷가 위에서 하루를 꼬박 새워야 했던 날이 부지기수였던 이 작품은 대중에게 김명수라는 배우를 다시 한 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후 김명수는 ‘각시탈’, ‘정도전’, ‘대조영’, ‘장사의 신-객주’ 등 사극은 물론 ‘언니는 살아있다’, ‘훈장 오순남’, ‘사랑은 방울방울’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다. 특히 ‘장사의 신’에서는 쇠살주 역을 맡아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했다.

하지만 이런 다작(多作) 활동은 그만큼 김명수가 그만큼 극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고 빨리 퇴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연기를 알고 보는 시청자들에겐 김명수의 극 중 잦은 죽음(?)과 퇴장이 아쉬울 따름이다.

“저도 그 부분은 많이 아쉽죠. 늘 뒷풀이 자리가 있으면 작가, 감독님들께 ‘다음엔 좀 더 길게 나올 수 있는 역할을 달라’고 하곤 해요. 그런데 뭔가 짧게 나오면서 임팩트를 줘야 하는 역할이 있으면 그렇게 제가 떠오르는 모양이에요.”

이런 아쉬움을 토로한 그지만 “짧게 등장하는 역할에도 장점은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운용의 묘(妙)가 있다는 것.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역할들은 아무래도 배우가 깊게 배역을 파고드는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어요. 그리고 이야기를 늘려가다 보면 캐릭터가 변질된다고 해야 할까요? 이 캐릭터가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어요. 반면에 제가 주로 맡는 배역들은 이미 하차할 때까지의 대본을 다 받아놓는 경우라서 배우 스스로 여러 가지를 시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죠.”

이어 김명수는 그와 마찬가지로 임팩트 있는 연기로 사랑 받고 있는 김갑수의 이름을 거론하며 “내가 형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 배우로서는 감개무량한 일”이라고 말했다.

“과거에 故 차범석 선생님이 쓰신 작품에 김갑수 형님과 함께 형제로 캐스팅이 됐었어요. 그런데 그 이후에 갑수 형님이 유난히 작품 속에서 자주 돌아가시더라고요. 그리고 또 그 안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시는 분이잖아요. 그 분도 분량을 생각해 배역을 마다할 분이 아니에요. ‘역시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부터 저도 형님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어요. 가끔 좀 길게 나왔으면 하고 투정 부릴 때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좋은 일이죠.”

비록 종영까지 함께 하지 못해도 스포트라이트가 주연에게만 쏟아져도 그는 늘 맡은 배역에 충실하고자 노력한다. 먼 길을 돌아 자신에게 오는 배역이 결국은 ‘숙명’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저라는 사람은 연기 외에는 아무런 재주가 없어요. 부업의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할 줄 아는 것이 연기뿐이었으니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하는데 시간을 쏟았죠.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제가 다른 분야에 눈독을 들였다면 촬영이 끝나고 선후배들과 인사를 나누는 기쁨. 그리고 조금씩 인정을 받으며 제 영역을 확장시켜가는 기쁨은 몰랐을 테니까 말이죠.”

동아닷컴 곽현수 기자 abroad@donga.com
사진│동아닷컴 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