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탈모로 공 대신 모자를 잡았던 나 김재박은 내 머리에 태그를 했다

입력 2012-08-3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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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왕년의 홈런왕, 지금은 63세의 나이에 유니폼을 다시 입고 2군 인스트럭터로 새 야구인생을 걷고 있다. 두산 김우열 2군 인스트럭터가 방망이를 들고 밝게 웃고 있다. 이천|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 seven7sola

33살에 대한민국 첫 번째 프로야구 선수
두산 2군 인스트럭터로 ‘제3의 야구인생’

그 당시 OB엔 메리트시스템이 있었다
돈을 몰라 후배들 배불리는데 다 썼지

1985년 망막염…1987년 아쉬운 은퇴
팬들이 소식듣고 ‘내 눈 준다’는 말까지

은퇴 뒤 2군 코치…올 다시 인스트럭터
2군 내려온 선수는 마음이 아프다…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게 내가 하는 일


그는 한국프로야구 1호 선수였다. 실업야구 시절 작은 체격에도 강력한 스윙으로 홈런왕을 3차례나 차지했다. 아이들이 유난히 좋아했던 선수. 40여년의 야구인생. 돈을 몰라 초창기 대박을 놓쳤다. 63세의 나이에 유니폼을 다시 입고 자식 같은 선수들에게 정을 주고 있다.


○대한민국 첫 번째 프로야구선수

33세에 프로행을 선언했다. 최초였다. 사연이 있다. 프로 진출을 놓고 고민이 많았다. 당시 제일은행 대리 3년차였다. 이용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이 연락을 했다. “아마추어 야구스타 가운데 인기가 높은 내가 먼저 프로행을 선언해야 다른 선수들이 뒤를 따를 것이라며 설득했다. 김병우 제일은행 감독도 ‘네가 가야 프로야구가 산다. 희생해라’고 조언했다.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가장 먼저 프로행 신청서를 냈다.”

그는 아마야구의 전설이었다. 특히 홈런에 관한 많은 기록을 갖고 있었다. 실업야구 통산 127홈런을 쳤다. 고 박현식(134개)에 이은 2위였다. 6연속경기홈런에 동대구문장 장외로 가는 최장거리홈런기록도 있다. 19세에 박영길 김응룡 등을 제치고 홈런왕에 올랐던 전국구 스타였다.

1982년 개막전 선서를 놓고 KBO에서 연락이 왔다. 윤동균과는 같은 나이. 학교는 1년 선배였지만, 생일은 윤동균이 빨랐다. KBO는 나이대로 하겠다고 했다. 영광의 선서는 놓쳤지만 OB의 첫 주장은 그의 몫이었다. 등번호 3번을 달고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일본프로야구를 경험했던 김영덕 감독으로부터 몸 관리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 ‘1년에 24∼25경기를 하는 아마야구와 80경기를 넘게 하는 프로야구는 차원이 다르다’며 체력을 특별히 강조했다. 결국 체력과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전반기에 홈런을 많이 쳤다. 가장 먼저 10호 홈런을 쳤다. 후반기에 이만수와 충돌해 부상을 당했다. 체력도 떨어졌다. 체력만 됐다면 홈런왕이 됐을 텐데….”


○OB 우승은 인화, 그리고 베테랑의 힘

주장이지만 분위기 메이커였다. “스트레칭 때만 되면 이광환 코치가 나를 불렀다. 사람을 웃기는데 일가견이 있어 선수들의 긴장을 풀어줬다. 재미있는 옛날 얘기도 하고, 고 허장강 흉내도 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팀을 꼴찌라 예상했지만 우리는 선참과 중간, 막내의 3박자가 잘 맞아떨어졌다. 선수들의 나이가 많았지만 구력으로 이겼다.”

메리트시스템으로 돈도 풍족했다. “한 경기에 잘 하면 30만∼50만원을 받았다. 이 돈을 경기에 나가지 못한 후배들에게 ‘소주 한 잔 사 먹으라’며 나눠줬다. 그땐 돈을 몰랐다. 알았으면 땅도 사고 했겠지만 쉽게 썼다. 전반기 우승 보너스로 200만원을 받았고, 한국시리즈 우승 때도 비슷한 돈을 받았다. 큰 돈인데 돈을 모을지 몰랐다.”


○김우열의 아날로그 시대 회상 스토리 3개

“대구구장이었다. 정수리의 머리숱이 없어 모자에 신경을 썼다. TV 중계가 있는 날이었는데 타구를 쫓아가다 모자가 벗겨졌다. 머리를 보여주기 싫어 공 대신 모자부터 먼저 잡으러 갔다. 감독이 노발대발했다. 이후 김재박(MBC)은 내가 2루에 들어갈 때마다 다리 대신 머리를 태그하며 장난을 쳤다.”

“TV 중계가 있는 날이면 일부러 풀카운트까지 갔다. 화면에 내 모습을 많이 보여주려고 했다. 어린이에게 유난히 인기가 좋았다. 불광동의 집으로 아이들이 사인을 받으러 와서 자주 초인종을 누르는 통에 아내가 대신 사인을 해주곤 했다. 82년 어린이날에는 대전에서 우리 팀의 경기가 있는데 나는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벌어진 행사에 참가했다.”

“명동에서 심야에 택시를 잡으려고 하면 더블을 부르던 때였다. 기사들이 나를 보면 차를 후진해서라도 태워줬다. 프로야구 라디오 중계를 자주 듣던 기사들은 사인볼을 달라며 집까지 함께 갔다. 차를 세우고 같이 술도 마셨다. 대전에선 거리에 나다니지도 못했다.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가면 팬들이 내 앞으로 술을 보내주는데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82년 한국시리즈의 아쉬운 추억

OB는 예상을 깨고 원년 우승을 차지했다. 베테랑의 힘이 컸다. “6차전을 앞두고 타율 3할에 홈런도 2개 쳤다. 타점도 많았다. 윤동균도 1번타자로 잘했다. MVP는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고 했다.”

김유동의 역사적인 만루홈런이 나오기 전에 김우열에게 기회가 있었다. “9회 1사 만루서 타석에 들어갔다. 볼카운트 2-1서 스퀴즈 사인이 나왔다. 실업야구에서도 해본 적이 없는 번트였다. 지금도 왜 그런 사인이 나왔는지 궁금하다. 볼이 빠졌는데 억지로 맞혀 파울이 됐다. 결국 2-1서 유격수 플라이아웃이 됐다. 이어 신경식이 밀어내기 포볼로 나가고 김유동의 만루홈런이 나왔다.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눈 때문에 슬럼프, 그리고 아쉬운 은퇴

1985년부터 갑자기 슬럼프가 왔다. 공이 배트에 맞지 않았다. 이유를 몰랐다. 오른쪽 눈에 이상이 생긴 것을 나중에 알았다.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들도 못 고친다고 했다. 중심성 망막염이었다. “한 눈이 안보이자 별 방법을 다 써봤다. 내 소식을 들은 어느 팬은 자신의 한 눈을 준다고 했다. 소용이 없었다. 결국 86년 빙그레로 트레이드됐다. 대전 팬들에게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1987년 은퇴 뒤 OB, 쌍방울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2군에서 무명 선수들을 많이 지도했다. OB 김상호 박현영 장원진 안경현, 쌍방울 박경완 김기태 등과 함께 했다. 그들을 위해 안수기도를 해줬다. 타자에게 기를 넣어주는 그만의 비법이었다. “선수의 눈을 보면 그날 안타를 칠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잘 칠 것 같은 선수에게 기를 넣어줬다. ‘나는 널 사랑한다. 내가 잘 칠 수 있도록 해주겠다’며 기합을 넣으면 선수들이 깜짝 놀랐다. 김상호는 안수기도를 받고 만루홈런도 쳤다.”

올해 후배 김진욱 감독으로부터 두산 2군 인스트럭터를 제의 받았다. 다시 입은 유니폼. 모든 것이 기쁘다고 했다. 자식 같은 선수들과 함께 경기도 이천 2군 숙소에서 지내고 있다. “야구에는 슬럼프가 없다. 이틀 못 치면 다음날 칠 수 있는데, 머리 속에 다른 문제가 생겨 슬럼프가 온다. 코치는 선수에게 정을 많이 줘야 한다. 2군에 내려온 선수는 마음이 아프다. 이를 달래주며 다시 일어나게끔 해줘야 한다. 실패가 있어야 성공도 있는 것 아니냐.”

중학교 때 같은 동네로 이사를 온 배성서(선린상고)의 유니폼이 멋있어서 시작한 야구. 부모를 졸라 시작해 40년을 훌쩍 넘겼다. 야구가 좋았다. 열심히 했다. 후회는 단 한 가지. 프로야구가 조금 일찍 생겼더라면 하는 것이다. “이승엽 등 좋은 후배들과 한번 겨뤄봤으면 어땠을까. 물론 후회는 항상 있는 것이지만….”


김우열은?

▲생년월일=1949년 9월 9일
▲출신교=선린상고
▲프로선수 경력(우투우타·외야수)=1982년 OB∼1986년 빙그레
▲프로통산 성적=5시즌 342경기 1076타수 299안타(타율 0.278) 41홈런 173타점 ※1982년 타격 8위(0.310)-홈런 4위(13개), 1984년 홈런 6위(12개)-타점 6위(49개)-도루 10위(13개)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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