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롯데 최준석. 스포츠동아DB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성공의 비결을 ‘첫째는 체력, 둘째는 재능’이라고 했습니다. 스포츠도 재능이 꼭 성공과 비례하지만은 않는 분야입니다. 여기서 재능은 기술습득 속도뿐 아니라 멘탈까지 포함합니다. 탁월한 하드웨어를 지녔어도 소프트웨어가 약하면 외부 자극에 흔들리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멘탈이 약한 선수는 슬럼프가 더 긴 슬럼프를 부르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습니다.
#지명타자란 직업을 가진 선수라면 멘탈이 성공의 열쇠입니다. 이들은 잘 던지거나, 잘 뛰거나, 잘 잡거나 같은 야구에 필요한 덕목 중에서 오직 하나, 잘 치는 재능 하나로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얼핏 지명타자는 수비는 안 하니 편한 직업 같습니다만, 치는 것 외에 보여줄 무기가 없다는 것은 부담일 수 있죠. 선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지명타자가 더 어렵다”는 소리도 곧잘 들립니다. 가령 SK 이재원은 지명타자보다 포수로 나가는 것을 선호합니다. “수비를 안 하면 타격리듬을 맞추기 어려워요. 특히 안 맞을 때, 덕아웃에 앉아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요. 온갖 생각도 나고요.” 지명타자는 아니지만 롯데 손아섭도 “못 칠 때 외야로 글러브 끼고 나가면, 수비만 생각하면 되니까 (방망이를 잊을 수 있어) 차라리 낫다”고 말합니다. 메이저리그 피츠버그로 건너간 강정호만 봐도 지금까지 친 9안타가 전부 선발출전했을 때 나왔죠. 대타로는 7타수 무안타였습니다.
#지명타자가 수비 때 덕아웃에서 농담만 하다, 공격 때 잠깐 나가서 치고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계속 움직이며 몸을 풀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자료를 챙겨봐야 하죠. 흐름을 읽고 타격을 할 줄 알아야 하니까 베테랑 타자들이 유리할 수 있죠. 삼성 이승엽, NC 이호준, KIA 최희섭 등이 그렇습니다. 선수는 체력안배를 할 수 있고, 팀은 베테랑의 공격능력만 취할 수 있으니 윈-윈입니다.
#롯데 최준석처럼 오직 방망이로만 존재를 말할 수 있는, 지명타자가 천직인 스타일도 있습니다. 이런 유형은 수비를 시키면 오히려 타격에 지장을 받을 수 있죠. KIA 나지완도 팀 사정에 의해 익숙하지 않은 외야수로 나가야 했죠. 결국 공수에서 엉킨 나지완의 2군행을 두고 최희섭은 “내가 대타로 나가도 좋으니 (나)지완이가 잘 칠 수만 있으면 지명타자를 해도 좋은데…”라고 안타까워하더군요. 지명타자는 ‘1경기에 대타로 3∼4번 나가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찰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보직, 어지간한 선수라면 할 수 있는 것 같아도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자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덕아웃에서 ‘꽃보직’은 없습니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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