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추행 사건을 시작으로 많은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김기덕 감독, 영화 ‘전망 좋은 집’ 이수성 감독에 이어 또 다시 여배우 성추행이다. 영화 촬영 도중 일어난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 여배우 A씨는 이날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자신의 심정과 앞으로의 계획을 담은 편지로 대신했다.
여성영화모임, 한국여성민우회 등 여배우 A씨에 대한 배우 조덕제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는 24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화문변호사회 조영래홀에서 남배우 A 성폭력 사건 항소심 유죄 판결 환영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날 사건의 당사자인 여배우 A씨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날 가장 먼저 여배우 A씨 측 조인섭 변호사는 “1심 판결의 경우 피해자의 진술을 믿기 어렵고, 설사 신체접촉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업무로 인한 행위로서 형법 제20조에 의하여 정당행위로 위법성이 조각된다”며 “2심 판결의 경우 계획적, 의도적 행위가 아니었다거나 감독의 연기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하여 추행의 고의가 부정된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고 설명했다.
또 이번 유죄판결의 의미에 대해 “영화촬영장에서의 연기 등으로 인한 추행에 대한 판단기준을 마련한 판결이다. 감독의 지시가 있다고 하더라도 연기내용에 대해서 피해자와 공유가 되지 않는 이상 ‘연기에 충실한 것일 뿐이다’라는 말로는 면죄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며 “다만 강제추행이 인정되고 무고의 죄책까지 인정됐음에도 불구하고 형량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나온 부분은 아쉽다”고 덧붙였다.
이어 한국독립영화협회 운영위 백재호는 “본 영화는 15세 관람가의 멜로, 로맨스 영화입니다. 피해자가 맡은 역할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입니다. 시나리오와 콘티, 그리고 실제로 개봉한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사건에서 일어나 신에서 중요하게 표현되는 부분은 성적인 노출이 아니라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는 인물의 모습입니다. 미리 예정되어 있던 대로 연기를 하지 않는다면 NG가 날 가능성이 큽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촬영영상에 담겨져 있는 합의되지 않은 가해자의 폭력이나 피해자의 상체를 노출시킨 행위만으로도 범죄입니다. 상호 합의 되지 않은 행위가 연기라는 명목의 업무상 행위로 판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현실의 범죄가 연기니까 혹은 영화니까 라며 면죄부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과 이 사건의 판결은 그동안 가려져 있던 수많은 영화계 내 성폭력, 위계폭력들, 잘못된 관행들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피해자가 어렵게 낸 용기와 노력이 선정적인 가십으로 소모되지 않기를 바랍니다”고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생각을 덧붙였다.
찍는페미 공동대표 정다솔은 “저는 과거 이 사건을 앞으로 영화계를 바꿀 유일무이한 사건이라고 말했었습니다.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에 영화계가 힘을 실어주고, 또 대중들이 그 문제를 인식하는 변화가 이제 막 시간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는 제도와 영화계 노동 환경이 바뀌어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피해를 당했는지에 집중하는 것은 또 다른 피해를 만들게 됩니다. 그 지점보다 제도와 환경개선 문제에 집중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라고 발언했다.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이번의 항소심 판결은 연기 중이더라도 상대배우의 성적자기결정권은 충분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밝히며 연기를 빌미로 한 범죄 행위라고 명확히 하였습니다. 상호간의 합의가 있어야 하고 합의는 결국 구체성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달라져야 합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영화를 만드는 모든 현장에 부탁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혹 현장에서 성폭행 피해의 목소리가 들리면 오해를 벗고 일단 잘 들어 봐주길 바랍니다. 영화계 내 성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김미순 상임대표는 “본 사건의 피고인은 오랜 경력의 연기 전문가입니다. 순간적. 우발적 흥분 상태가 되더라도 자신의 행위를 어떻게 제어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 전문가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본 사유는 양형상 감형의 요소에서 배제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연기를 시작하는, 활동 중에 있지만 부당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연기생활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 하에 참아왔던 많은 분들에게 용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 한국여성민우회 여성연예인인권지원센터 윤정주 소장은 “가해자는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놓고 억울하다는 인터뷰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가해자의 입장을 재변하는 기사를 무차별적으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내용 또한 문제입니다. 언론은 성폭력 보도준칙에 따라 피해자를 특정 할 수 없도록 여과해서 보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론들은 피해자의 신상이 드러나게 하는 등 2차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인권위에서 제정한 성폭력보도준칙에는 피해 사실을 자세하게 보도하지 말 것을 언론에 요구합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여배우 A씨는 직접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에 대해 공동위 측은 “피해자 분은 현장에 오시지 못하게 됐다. 일단 피해자가 보낸 편지를 대독하는 것으로 하겠다”며 “오늘 새벽까지도 편지를 수정하셨다. 이 자리에서 발언을 하시고 싶어 하시는 의지가 크셨다”고 말했다.
편지를 통해 여배우 A씨는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기자회견에 와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이 사건이 단순히 가십으로 되지 않고, 어떻게 성폭력이 행해지고 있는 지를 고민하는 기회로 나아가기를 바란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나는 경력 15년이 넘는 연기자다. 돌발 상황에 대한 유연한 대처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전문가다. 하지만 당시 패닉 상황에 빠져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제 서야 왜 피해자들이 신고나 고소를 망설이는지 알게 됐다. 나는 폭행과 추행을 당했다. 연기 경력이 20년이 넘는 피고인 동의 없이 추행을 지속했다. 사전에 상대 배우와 논의하고 동의를 얻는 것이 합의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피고인은 나와 합의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 이런 것이 영화계의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옹호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배우 A씨는 “무섭고 고통스러워 외부에 퍼지는 것조차 싫었던 내가 외부에 공론화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내 상황이 무시됐다. 영화성의 특수성을 재판부가 이해하지 못했고, 다른 피해자들과 같음은 인정받지 못했다. 고통에 허위 기사의 추가 피해까지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울고 넘어지면서도 사건을 처음부터 돌아보기 시작했다. 피해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피해자의 자격을 묻는 피고인 측의 공격에 많은 상처를 받으면서도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에 집중해 대응했다. 고통스럽지만 가해행위가 담긴 영상을 보면서 분석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들은 여전히 해결해야할 과제들이 우리에게 있다. 본 사건의 피고인은 항소심 재판부의 이런 판결에도 불구하고 항소심 판결 직후 ‘세상이 무섭다’ ‘억울하다’며 여전히 자신의 가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사실과 다른 일방적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는 영화 속 피해자 배역 이름을 거론하며 피해자의 신상을 노출하는 등 2차 피해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언론 또한 이런 가해자의 주장을 거르지 않고 제대로 취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보내며 2차 피해를 확산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을 받아드리고,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중단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남배우 A 사건의 항소심 판결이 계기가 되어 영화를 위해선 뭐든 용인될 수 있다는 이러한 생각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온 폭력은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향후에도 남배우A사건 공동대책위 참여 단체들은 남배우A사건에 그치지 않고 영화계 내 성폭력 사건이 사라지고 성평등한 현장이 정착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라고 마무리 지었다.
마지막으로 여배우 A씨는 “30개월 만에 같음을 인정받고 다름을 이해받았다. 부수적인 피해나 과실이 아니라 명백한 폭력이라고 사법 시스템이 판단을 내렸다. 앞으로 연기에 장애가 있을 지도 모른다. 피해자들에게 나는 희망이 되고 싶다. 담담하거나 강한 사람이 아니다. 투사가 되기엔 마음도 약하다. 연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싸우고 연대하겠다. 여전히 고통스럽고 시원하지는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말부터 하겠다.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고 마무리지었다.
한편 남배우 A씨인 배우 조덕제는 지난 2015년 4월, 영화 촬영 중 여배우 A씨와 상호 협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속옷을 찢고 바지에 손을 넣어 신체 부위를 만지는 등의 성추행을 일삼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후 여배우 A씨는 조덕제를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고소했다. 2016년 12월에 열린 성추행 사건 1심 재판에서 검찰은 조덕제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으나, 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재판부는 항소심에서 조덕제에게 징역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함과 동시에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했다.
동아닷컴 최윤나 기자 yyynn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