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하나에수천만원‘훨훨’…“아!내돈”

입력 2008-07-14 00: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이범석(23·KIA). 그는 대형 사고(?)를 치기 전까지 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저 그런’ 투수였다. 지난해부터 종종 모습을 보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볼만 빠른’ 투수 중 하나였을 뿐. 그러나 7월 4일 대구 삼성전에서 9회 투아웃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다 박석민에게 아쉽게 내야안타를 허용, 대기록 직전에 눈물을 흘렸지만 그래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깜짝 스타’로 등장했다. ○ 잠 설친 그날 밤 안타까움을 삭히며 밥을 먹고 있는데 ‘(박)석민이 안타 하나에 수 천 만원이 날아갔다’는 선배들의 말에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대기록을 달성하면 여기저기서 받는 봉투가 수 천만 원이 될 것이란 걸 뒤늦게 알고 나서 잠자리에 누웠는데 ‘날아간 돈 생각’만 나더란다. 올해 연봉 2300만원을 받는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 ‘아쉽지만 그래도 완봉승에 만족해야지’라던 그는 프로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는 기회도 날아가고, 더욱이 연봉보다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날린 뒤 충격으로 며칠간 가슴앓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 다시 못 올 기회란 걸 알지만… 앞으로 또 다시 노히트노런에 도전할 기회가 올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처럼 자연스럽게 하다가 올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면서 “그것보다 이번 완봉승을 통해 어느 때보다 더 큰 자신감을 얻었기에 아쉬움은 며칠 마음 고생으로 훌훌 털어냈다”고 했다. ○ 고교 4학년, 드디어 첫 꿈을 이루다 청주기공 3학년 2학기 어느 날, 프로 입단은 물론 대학 진학도 어려운 그에게 강정길 감독은 ‘1년 더’ 학교를 다닐 것을 제안했다. 빈 외야 한자리를 채워주면서 동시에 투수로 뛰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투수의 꿈을 갖고 있던 그는 결국 ‘4학년’을 받아들였고, 투수 전향 만 1년도 되지 않아 ‘볼이 빠르다’,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를 받으며 2005년 KIA에 입단했다. 본인도 기대 못했던 2차 2번이란 빠른 순서로. ○ 고통으로 시작한 프로생활 입단에 앞서 프로선배들과 함께 한 2004년 마무리캠프. 정말 ‘미친 듯이’ 볼을 맘껏 던졌고, 시속 150km 가까운 직구로 누구보다 기대도 많이 받았다. 첫 청백전 1이닝 등판에서 당시 쟁쟁한 선배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프로에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건만, 웬걸. 그 다음날 팔을 들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찾아왔고, 결국 첫 시즌을 재활군에서 시작했다. 전화기를 붙들고 울먹이던 그에게 어머니 정명순씨는 “2군이라도 좋으니까 10년만 프로선수 생활을 해라”고 다독였다. 너무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너무 큰 상처 받지 말라는 당부였고, 거기서 그는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 수술과 좌절 재활과 치료를 병행하며 1군 8경기에서 단 7.1이닝, 1패를 기록한 그는 결국 2005년 7월 오른쪽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이때부터 기나 긴 ‘재활의 터널’에 들어섰다. ‘나는 왜 안 될까. 나보다 못한 놈들도 저렇게 잘 하고 있는데….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며 좌절하기 여러 차례, 때로는 운동을 해야 할 때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기도 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개식이’였다. ○ 다잡은 마음, 그리고 확인한 가능성 어느 순간,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다시 마운드에 선다’는 각오를 한 그는 2006년을 통째로 재활에 매달리며 부상을 털어냈고, 2007년 1군 27경기에 등판, 42.2이닝을 던져 3패를 기록했다. 비록 기록은 보잘 것 없었지만 여기저기서 ‘저 놈은 내년에 일 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쏟아졌고, 그래서 지난 스프링캠프에서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 노히트노런보다 더 감격적인 프로 첫 승 그렇게 열심히 했건만 스프링캠프 막판 체력이 떨어지며 개막 엔트리 첫 진입이란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지난해보다 하루 이른 4월 12일, 1군 호출을 받은 것에 위안을 삼았다. 올 시즌 2번째 선발등판이었던 5월 7일 광주 삼성전. 6이닝 1실점(비자책점)으로 꿈에도 잊지 못할 데뷔 첫 승에 입맞춤했다. 묘하게 그 때도 삼성이 행운을 가져다줬다. ‘볼만 빠른 투수’가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 건 제구력이었다. 직구가 마음먹은 대로 들어가면서 아직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변화구도 덩달아 효과를 보고 있다. 그가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건 몇 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앞날은 더 기대된다. ○ 이름 없는 나, 나는 대한민국 에이스 스스로 이야기 하듯 그는 ‘이름 없는 선수’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잘해 본적도 없다. 고교시절 함께 땀을 흘렸던 선수들 중 지금 프로에 와있는 선수는 같은 팀 후배인 손영민 정도다. 다른 팀에 선후배, 친구들이 있는 선수들을 보면 부러울 때가 많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KIA 선수들 밖에 모른다. 나도 못했고, 친구들도 못하는 시골에서 야구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마운드에 오를 때면 항상 ‘내가 대한민국 에이스다’라고 스스로 주문을 건다. 대기록을 아쉽게 놓친 그날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누구를 닮고 싶으냐’는 질문에 “딱히 생각나는 투수가 없다. 다만 서른여덟까지 투수 생활을 하고 싶은 게 꿈”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광주=김도헌 기자 dohoney@donga.com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