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열의포스트게임]커미셔너와총재사이

입력 2008-12-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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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커미셔너 제도는 1920년에 처음 도입됐다. 구단주들은 191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승부조작 ‘블랙삭스 스캔들’로 메이저리그가 추문에 휩싸이자 야구와 전혀 연관이 없었던 연방판사 출신의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를 수장으로 추대했다. 그가 첫번째 한 일은 블랙삭스 스캔들을 파헤치고 해당자들을 야구계에서 영구추방시킨 것이다. 당시 최고의 타자였던 ‘슈리스(맨발)’ 조 잭슨을 포함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현역 선수 8명을 비롯해 총 21명이 랜디스 커미셔너에 의해 야구계에서 영구추방 당했다. 그는 판사답게 추상같았고 도박으로 얼룩진 메이저리그를 정화했다. 24년 동안 야구계에 봉사한 랜디스는 역대 메이저리그 커미셔너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그러나 제 3대 포드 프릭처럼 자질이 의문스러운 커미셔너도 있었다. 스포츠 기자 출신의 프릭은 1951년부터 1965년까지 오랫동안 재임했다. 뚜렷하게 한 일은 없었지만 물의를 일으킨 적은 있다. 1961년 뉴욕 양키스 로저 매리스가 61개의 홈런으로 베이브 루스의 한시즌 최다홈런을 경신하자 “루스의 홈런은 156게임에서 작성된 것이고 매리스는 162경기에서 기록을 세웠으므로 별표를 표시해야 된다”는 시대착오적 주장으로 팬들의 반발을 샀다. 프릭은 루스의 열렬한 팬이었고, 루스 전기를 쓴 대필자이기도 했다. 프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70년 원로위원회에서 스스로 자신을 명예의 전당에 추대했다. 하지만 명예의 전당은 1978년 타계한 프릭을 기리며 ‘포드 C 프릭 어워드’를 제정해 신문기자들의 명예의 전당행 길을 터놓았다. 메이저리그는 1920년 초대 랜디스를 포함해 현 버드 셀릭까지 88년 동안 모두 9명의 커미셔너를 배출했다. 각 시대마다 커미셔너의 역할이 달랐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1984년에는 LA 올림픽 조직위원장 출신인 피터 위베로스를 추대한 적이 있다. 그러나 너무 상업성에 물들자 후임으로 예일대 총장 출신의 바트 지아마티를 커미셔너로 영입, 야구의 고결함을 보존하려고 애썼다. 지아마티도 도박을 한 피트 로즈를 영구추방시켰다. 공교롭게도 야구계에 추앙을 받았던 랜디스와 지아마티 두 커미셔너는 강타자 ‘슈리스’ 조 잭슨과 최다안타 기록보유자 피트 로즈를 각각 영구추방시켰고, 현직에서 사망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국프로야구도 메이저리그의 커미셔너제도를 본 따 1981년 국방부 장관 출신인 서종철씨를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초대 총재로 영입했다. 지난 28년 동안 현 신상우 총재를 비롯해 모두 10명의 총재가 배출됐다. 평균 재임기간이 2.8년이다. 박용오 총재와 서종철 총재가 가장 긴 7년 역임을 한 것을 고려하면 잠시 얼굴마담으로 거쳐간 총재가 수두룩했다. 오명, 권영해, 정대철 총재 등은 1년도 안돼 물러났다. KBO의 총재가 얼마나 정치적인 입김에 따라 바뀌었는지를 알 수 있다. 커미셔너의 권한은 막강하다. 구단주들이 커미셔너를 선정하지만 때로는 구단주들과 충돌한다. 이른바 ‘커미셔너십’으로 통하는 고유권한의 월권여부 때문이다. 페이 빈센트 커미셔너가 연임을 못하고 3년 만에 물러난 것은 구단주들의 직장폐쇄 때 월권을 했다는 이유에서 재신임을 받지 못해서다. 신상우 총재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야구계 수장이 됐다. 현대 유니콘스가 존속했다면 WBC 4강진출,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 등이 고스란히 총재의 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태어나지 말아야할 구단 우리 히어로즈가 신 총재의 발목을 끝끝내 잡고 있다. 신 총재는 커미셔너십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스포츠 단체 가운데 최고의 조직으로 평가받았던 KBO는 이제 무능한 집단으로 전락했다. 누구 때문일까. 문상열 스포츠동아 미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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