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인메모리]야구선수에서사장님으로…안언학

입력 2009-01-0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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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MBC û

힘겨울 때일수록 사람이 그립습니다. 옛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스포츠동아는 스토브리그 동안 팬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추억 속의 스타를 찾아가는 ‘피플 인 메모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은퇴 후 스포츠계에 몸담고 있지 않아 이름마저 가물가물해지는 ‘왕년의 선수’. 그들이 개척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인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대구중 시절부터 투타만능을 자랑하며 전국에 소문이 자자했던 야구천재. 초고교급 강속구 투수에서 LA올림픽 4번타자를 지낸 팔방미인. 그리고 프로 1차 지명…. 어릴 때부터 실크로드만 밟아온 그였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느닷없는 교통사고로 동료는 죽고,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동해안에서 정신요양을 하고 돌아왔지만 결국 환자 판명을 받고 방출됐다. 연습생으로 팀을 2차례나 옮기며 재기의 몸부림을 쳤지만 그는 일어서지 못했다. 팬들 사이에서는 “죽었다”는 풍문도 나돌았고, 그를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신 장애를 겪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야구계에서 사라진지 18년. 그러나 그는 무대 뒤편에서 기막힌 인생의 반전 드라마를 써나가고 있었다. 사업가로 변신해 성공신화를 쓰고 있는 것. 언뜻 보면 만화,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같지만 실화다. 소름마저 끼치는 극적인 스토리의 주인공은 바로 안언학(46)이다. 1980년대 야구를 기억하는 올드팬들이라면 곧바로 손으로 무릎을 칠 이름이다. ○노히트노런의 선동열을 꺾은 야구천재 서울 여의도 사무실. 선수 시절에도 큰 키에 탄탄한 체격을 자랑했지만 사장님으로 변신한 지금은 살까지 붙어 풍채도 위풍당당했다. “저를 그래도 기억해 주시네요. 여기까지 찾아주시고.” 야구팬이라면 어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명함에는 ‘(주)비지종합물류 대표 안언학’이 새겨져있다. 국내외 무역회사를 상대로 국제 수출입 화물운송을 하는 물류회사. 여의도 본사에는 7명의 직원이 자리를 지키지만 인천공항과 김포, 부산까지 합쳐 총 50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처음에 달랑 5명으로 시작한 사업은 날로 번창해 현재 연간 5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소기업으로 발전했다. 그의 얼굴을 보면서 1980년 뜨거웠던 여름날의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제10회 봉황기. ‘최강’ 광주일고의 선동열은 첫날 경기고전에서 15탈삼진 노히트노런을 작성했지만 2회전에서 ‘복병’ 중앙고에 무릎을 꿇었다. 당시 중앙고에는 이광환 감독이 대구중까지 찾아가 스카우트한 안언학이 버티고 있었다. 선동열과의 완투대결 끝에 3안타 완투승. 선동열은 훗날 가톨릭신문에 연재한 자서전에서 ‘광주일고 3학년 때 천안북일고 이상군, 중앙고 안언학, 명지고 정삼흠. 최고투수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을 뛰어넘어야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안언학은 선동열 정삼흠과 함께 고려대 81학번 동기가 됐다. 당시 고려대 최남수 감독은 안언학을 야수로 돌렸다. 그는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1984년 LA올림픽에서 유격수와 3루수를 오가며 4번타자로 나섰고, 호주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최고수비상을 받을 정도로 공수에서 발군의 활약을 펼쳤다. ○투타의 갈림길, 만능재능이 빚은 재앙 MBC 청룡은 1985년 1차 지명 때 당연히 안언학을 뽑았다. MBC 마운드는 원년부터 주축이던 하기룡 유종겸 이길환 등이 하향세를 걷고 있었다. 김재박 이광은이 주축이 된 방망이 또한 해태나 삼성에 비하면 어딘가 모르게 2% 부족한 상황이었다. 투수로 쓰든 타자로 기용하든, 투타만능의 안언학은 요긴하게 활용될 재목이었다. 그러나 다방면의 재능은 때로는 한곳에 천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재앙이 되곤 한다. 그는 투수를 하고 싶다고 했다. MBC 어우홍 감독은 “대학 4년간 투수를 거의 안했으니 반년이나 1년쯤은 수업을 받는다고 생각하라”며 허락했다. 그러나 1985년 전기리그가 끝난 뒤 어 감독이 경질되고 김동엽 감독이 빨간 장갑을 끼고 사령탑에 앉았다. 김동엽 감독은 다짜고짜 걸쭉한 황해도 사투리로 ‘안언학이 누구래? 니가 무슨 투수간. 오늘부터 타자 하라우!”라고 명령했다. 특유의 불도저 스타일로 선수 의사는 아랑곳없이 밀어붙였지만 아마시절 타격재능을 익히 알고 있었다. 졸지에 붙박이 3루수 이광은이 좌익수로 밀려나게 됐다. ○끔찍한 교통사고, 비운의 시작 1986년 11월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귀가하다 서울 내곡동 삼거리에서 시내버스와 충돌하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운전자 김정수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뒷자리의 김경표는 안면을, 조수석에 앉은 그는 머리를 크게 다쳤다. 프로야구 첫 교통사고 사망 사건으로 그 겨울은 떠들썩했다. 당시 얘기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흘렀다. 괜한 질문을 꺼냈나 싶어 미안한 표정을 짓는 기자에게 그는 “사실 이젠 세월이 많이 흘렀다”면서 당시의 상황을 더듬었다. “정수형은 그때 집안 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자고 있었는지 사고 순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 운전석 쪽으로 차가 반은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경표 형은 안면을 크게 다쳤죠. 그런데 경표 형은 복귀 후 1989년 다시 한번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한숨을 내쉬는 그의 눈가로 이슬이 비쳤다. “참 좋아했던 형들이었는데. 대학 시절 서초동 아파트를 빌려 정수형, 경표형, 정삼흠과 함께 동거를 하면서 야구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던 시절도 있었죠. 의형제처럼. 형들을 사고로 떠나보내고 엄청난 충격과 혼란을 겪었어요.” ○기억상실증, 환자판명 받고 세 번의 방출 병원치료 후 1987년 여름 복귀했지만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다. 구단은 결국 환자판정을 내렸다. 동해안의 조용한 곳에서 정신요양을 받고 왔지만 1987년 말 방출통보를 받았다. 구단은 재기불능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당시 옛날 일은 기억나는데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순간순간 잊어먹었어요. 사인이 나오는데 어떤 약속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거예요. 제 스스로도 방출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시 동해안에서 요양을 했다. 사고 후 3년째부터 기억이 완벽하게 돌아왔다. 당시 나이 27세. 야구를 포기하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그래서 중앙고 은사였던 OB 이광환 감독을 찾아가 “재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테스트 후 연습생으로 유니폼을 입히면서 “다시 투수를 하라”고 했다. 프로에서만 투수에서 야수로, 또 투수로 바뀌는 우여곡절. 공은 여전히 빨랐지만 팔꿈치 뼛조각이 부서졌다. 재기 실패. 1990년 다시 OB에서 방출됐다. 이광환 감독의 주선으로 창단팀 쌍방울 김인식 감독을 찾아갔다. 이번엔 또 타자로 변신했다. “91년 6월쯤으로 기억돼요. 복귀경기가 잠실 LG전이었어요. 전광판에 7번 3루수로 이름이 떴는데 당시 3만관중이 기립박수를 쳐 주시더라고요. 눈물이 났죠. 초등학교 야구 시작할 때처럼 너무 떨렸어요. 평범한 타구도 그렇게 빨라 보일 수가 없었고. 2회까지 5번인가 공이 왔는데 3번이나 실수하고 바로 벤치로 불려들어갔어요.” 그해 말 세 번째 방출통보를 받았다. 프로통산 타자로서 269타수 53안타(타율 0.197) 1홈런 20타점을 기록했고, 투수로 10경기 15이닝 승리 없이 2패, 방어율 9.00의 성적으로 마감했다. ○제2의 인생, ABC부터 배운 영어 정상에서 바닥까지 떨어진 그는 은퇴 후 반년 가량 방황했다. 그러다 우연히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문병 온 선배를 만나게 됐다. 물류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중앙고 10년 선배였다. 그 길로 그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국제운송이라는 종목부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운동만 하던 그에겐 외국어가 쉽지 않았다. “ABCD에서 Z까지 제대로 외우기도 힘든데 문서 하나도 모두 영어니까. 학원도 다니고, 시간만 나면 영어책을 팠어요. 회사 윗분들 따라다니면서 대화 내용을 어깨 너머로 귀담아 듣기도 했고요. 아예 대화를 통째로 외우기도 했죠.” 일을 모르니 사회 초년병 시절 ‘술상무’를 도맡았다. 거래처를 뚫다 퇴짜를 맞는 일도 부지기수지만 무작정 찾아가 “안언학입니다”라며 인사했다. 종종 “야구선수 안언학?”이라며 만남을 허락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저를 만나면 야구 얘기를 더 재미있어하더라고요. 저는 야구 얘기를 하고, 회사 전문가가 업무를 설명하는 식으로 거래처를 많이 뚫기도 했어요.” ○신의와 끈기가 성공의 지름길 그는 첫 직장에서 5년쯤 일을 배운 뒤 이탈리아에 본사를 둔 같은 계통의 외국계 회사에 들어가 전문가가 됐다. 그리고는 2005년 현재의 회사를 차렸다. 지금은 외국 기업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LG화학, 효성, 삼성전기, CJ인터넷 등 굵직한 기업들을 파트너로 삼고 있다. “신생 업체가 영업을 따기가 쉽지는 않았죠. 국내에 이 계통 업체가 2000개가 넘으니까 경쟁도 치열하고요. 결국 사회생활을 해보니 믿음을 바탕으로 고객을 모시는 것이 중요하더라고요. 일반인과는 달리 운동에서 배웠던 신의와 의리와 끈기로 사람을 만나다보니 사업 파트너들도 저를 믿어주시더라고요. 후배들도 역시 신의와 끈기로 뛰면 실패가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는 프로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재기에 실패했다. 빨간줄이 그어진 부초 같은 야구인생을 살았지만 제2의 인생은 ‘무한도전’이며 성공가도다. 그는 “먼저 간 정수형, 경표형을 대신해 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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