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열의멀리건] PGA성장기,파머빼곤논하지말라

입력 2009-09-20 17: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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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한국시간)은 1929년에 태어난 전설적인 골퍼 아널드 파머의 80세 생일이었다. 미국의 방송들은 이날 파머의 80세 생일을 모두 언급했다. 스포츠채널 ESPN은 파머가 PGA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크게 다뤘고, 골프채널은 특집방송으로 그의 생애를 기렸다. 파머의 닉네임이 ‘킹’인데 방송들은 “파머는 여전히 ‘킹’이다”며 찬양했다.

그는 이런 칭송을 받고 남을 만한 슈퍼스타였다. 한 때 암 수술을 받기도 했으나 요즘도 왕성한 활동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PGA 투어가 정상의 스포츠로서 높은 인기를 누리는 데는 파머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현재 영향력은 ‘골프 황제’로 군림하는 타이거 우즈이지만 50년대 이후 파머의 출현으로 골프는 급성장세를 보였다.

메이저리그가 국민적 스포츠로 발돋움할 때 뉴욕 양키스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가 있었듯이, PGA는 파머가 있었다. 파머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따라 다니는 구름 갤러리들을 ‘아니의 군단(Arnie’s Army)’이라고 불렀다.

국내에서는 골프가 항상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공직자의 옷을 벗기는 스포츠와는 별개의 호화 레저로 취급받았지만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골프는 곧잘 인생살이와 비교되고 명칼럼도 많다.

파머는 TV시대에 등장한 골프의 메가 스타다. 잘생긴 용모에 공격적인 스타일의 경기내용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허스키한 목소리도 매력적이다. 마스터스 대회가 4대 메이저 대회 가운데 가장 늦은 후발주자이면서 어개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데는 파머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다.

파머는 4차례 마스터스에서 우승했다.
‘디 오픈’으로 통하는 브리티시오픈도 1960년대 이전에는 큰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영국과 유럽선수들만의 무대였다.

정상급 실력을 갖춘 미국 선수들이 브리티시오픈에 참가하질 않았다. 상금은 적고 비행기 삯 등 비용이 많이 들어 외면했다.

그러나 파머가 참가하면서 달라졌다. 파머는 61년과 62년 브리티시오픈을 우승했고, 이후 미국 선수들이 대거 출전하기 시작했다.

골프선수가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딴 골프클럽 제조와 의류 판매의 원조도 아널드 파머다. 골프장 설계도 파머가 처음 시작했다. 미국 스포츠 사상 상금과 연봉 외에 광고수입으로 1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 선수 역시 그가 최초다. 현재 스포츠 계를 좌지우지하는 스포츠 에이전시 IMG 탄생도 파머와 함께 했다. IMG를 창설한 고 마크 맥코맥의 첫 번째 고객이 바로 파머였다. PGA는 파머와 함께 이후 ‘황금 곰’ 잭 니클로스, 남아공의 영웅 개리 플레이어가 등장하면서 트로이카 체제를 만들며 전성기를 구축했다.

니클로스와는 라이벌 관계를 이루면서 골프 대중화에 앞장섰다. 파머는 PGA 투어 62승을 작성했다. 메이저대회에서도 7차례 우승했다.

하지만 그랜드슬램을 모두 차지하지는 못했다.

PGA챔피언십은 3차례나 2위에 머물렀다. 요즘의 잣대로 보면 파머의 폼은 정석이라고 볼 수는 없다.

LA | 문상열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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