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김현진] 총성 없는 ‘핏빛 전쟁터’ 레드카펫의 꽃, ALL THAT DRESS

입력 2009-12-26 09:3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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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레드카펫 드레스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혜수가 올해 청룡영화제에서 선보인 페라가모의 블랙 드레스.

스타일 인 셀럽 ⑤
연말마다 치러지는 연예 시상식의 하이라이트는 여배우의 드레스다. 올해 부산영화제, 대종상시상식, 청룡영화제에서도 여배우의 드레스가 수상자들보다 더 큰 화제가 되는 주객전도 현상이 어김없이 나타났다.

드레스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날로 높아지자 여배우들은 드레스를 고르고 드레스를 소화해낼 몸매를 관리하는데 눈물겨운 노력을 쏟기 시작했다. 혹독한 다이어트와 태릉 선수촌 수준의 트레이닝은 기본이다. 단기간에 부풀리기 힘든 가슴 또는 엉덩이부위를 보강하기 위해 의학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난 9월 열린 제4회 '서울드라마어워즈 2009' 시상식에서 남다른 '발육상태'를 자랑하며 '리틀 김혜수'라는 애칭을 얻은 탤런트 고은아. 그는 최근 한 TV프로그램에서 "시상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부터 휴대전화 무선 인터넷을 통해 드레스에 대한 평가와 댓글을 읽어본다"고 말했다.

또 오랜만에 컴백한 배우들과 아직 뜨지 못한 신인들은 노출이 심한 파격적인 드레스를 통해 단번에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한다.

여배우들에게 레드카펫 드레스란, 자존심이자 가장 효과적인 홍보 수단인 것이다.


▶ '드레스 효과'와 드레스 속 비밀

이제는 국내 여배우들이 노출의 마지노선을 시험하듯 경쟁적으로 섹시한 드레스를 뽐내는 게 관행이 됐지만 사실 이렇게 아슬아슬한 수위의 드레스가 국내에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노출형 드레스의 선구자는 김혜수다. 그는 시상식 사회를 맡았던 올해 청룡영화제에서도 뽀송뽀송한 20대 후배들을 제치고 패션 관련 매체가 선정한 '베스트 드레서'로 꼽혔다. 가슴과 등 부분 일부만 동그랗게 파인 페라가모의 블랙 드레스를 입은 김혜수는 레드카펫 베테랑답게 '에지'있는 모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혜수는 국내에 레드카펫 드레스 문화가 없던 시절인 2000년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가슴 노출이 심한 구찌의 화이트 드레스를 입어 화제가 됐다.


시간을 뒤로 돌려 2000년 이맘 때 같은 시상식장에서 김혜수는 가슴의 윗부분을 그대로 드러낸 구찌의 화이트 드레스를 입었다. 요즘 트렌드와 비교해보면 보수적인 편에 속하는 이 드레스는 당시 스포츠 신문의 1면과 각종 가십 잡지의 커버를 장식했다.

2000년과 2009년 모두 김혜수의 청룡영화제 드레스 스타일링을 맡은 스타일리스트 정윤기 대표는 "이 드레스 이후 여배우들이 하나 둘 노출형 드레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차라리 벗고 나오지 그러냐" "말세다" 등 패션 선구자에 집중된 당시 여론에 겁먹은 여배우들은 그 후로 몇 해 동안 비슷한 수위의 노출조차 시도하지 못했다.

정 대표는 "2000년대 초반에도 외출용 투피스, 심지어 청바지를 입고 레드 카펫을 밟는 여배우들이 적지 않았다"고 말한다. 현재의 레드카펫 트렌드가 할리우드와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불과 5, 6년 전이라는 것이다.

역대 레드카펫 드레스 가운데 화끈한 노출로 지금까지 화제가 되는 드레스로는 2007년 10월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소연이 입었던 엠마뉴엘 웅가로와 2008년 4월 제44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모델 출신 배우 최여진이 선보인 미소니 드레스가 있다. 이들은 거의 명치끝까지 내려오면서 V 라인을 그리는 파격 드레스로 레드카펫 드레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얻었다. 드레스 효과를 톡톡히 보아 몸값도 덩달아 상승했다.

김소연은 당시 파격적인 드레스를 자신 있게 입을 수 있도록 도운 조력자로 접착력 좋은 양면테이프를 꼽았다. 드레스가 들떠 자칫 속살이 노출되는 사고를 막기 위해 몸과 드레스 사이에 양면테이프를 붙였다는 것이다.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할리우드에서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원시적인 방법들이 동원된다. 린제이 로한, 키이라 나이틀리 등의 스타일링을 담당하는 스타일리스트 레이첼 조는 저서 '스타일 시크릿'에서 △끈이 달린 평범한 브래지어 대신 볼륨감까지 줄 수 있는 '누드 브라'를 가슴에 붙일 것 △가느다란 드레스 끈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양면테이프나 속눈썹을 붙일 때 쓰는 접착제를 활용할 것 등을 조언했다. 머리 좋은 한국인들은 한 발 더 나아가 투명 낚시줄을 활용하는 응용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레드 카펫 위에서 우아하게 손을 흔드는 여배우들의 모습 뒤에는 백조처럼 물속에서 쉴 새 없이 발을 굴러야 하는 인간적인 면모가 숨겨져 있다.


▶ 드레스는 산업이다

최근 할리우드에서는 레드카펫 문화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하려는 시도가 줄을 잇고 있다. 미국의 저명 칼럼니스트 브론윈 코스그레이브는 저서 '레드카펫: 패션, 아카데미 시상식을 만나다'에서 레드카펫 관련 산업이 형성되기까지 일부 여배우들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평가했다.

영화사에 소속된 영화 의상 담당 '코스튬 디자이너'가 시상식 드레스까지 책임졌던 관행을 깨고 파리에서 패션을 공부한 부티크 디자이너 아이린에게 옷을 맞춰 입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비비언 리, TV를 통해 첫 중계된 1951년 제3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디오르의 새틴 소재 칵테일 드레스를 입은 마를렌 디트리히가 그들이다. 코스그레이브의 책을 번역한 재미(在美) 광고기획자 조 벡 씨는 "특히 디트리히의 드레스가 화제가 됐다. 시상식 다음날 신문들의 1면 제목을 장식한 것은 6개 부문에서 수상한 영화 '이브의 모든 것'이 아니라 디트리히의 레드 카펫 패션이었다"고 말했다.

2008년 4월 제44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는 모델 출신 배우 최여진이 입은 미소니 드레스가 최대 화제거리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명품 브랜드들이 스타들에 적극적으로 구애하면서 공짜 선물을 보내는 지금 같은 분위기는 없었다. 레드카펫은 물론 영화 속에서 입을 의상을 제작해주는데도 명품 브랜드는 인색한 반응을 보였다.

프랑스의 비즈니스스쿨 ESSEC에서 패션사를 가르치는,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전기 작가 마리프랑스 포슈나 교수는 1955년 프랑스의 유명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영화 '아름다운 신부'에서 입을 웨딩드레스 디자인을 디오르에게 부탁했다 거절당한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디오르는 저속한 영화에 자신의 드레스를 제공함으로써 우아한 단골 고객들의 분노를 사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무대나 화면에서 어설프게 귀족 흉내를 내는 배우들보다 실제 귀족들이 미적으로 훨씬 높은 수준에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이러한 고압적인 자세에서 탈피, 할리우드 스타들의 상업적 가치를 일찌감치 간파하고 시상식을 위한 드레스와 슈트 협찬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디자이너는 조르지오 아르마니였다.

'뉴스위크' 출신의 패션 저널리스트인 데이나 토마스의 저서 '럭셔리'에 따르면 1985년 아르마니는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사회부 기자 출신의 완다 맥대니얼을 연예계 담당 홍보 이사로 고용하고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아르마니를 입히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1980년대 중후반에는 할리우드의 최고 스타들조차 레드카펫에 어울리는 완벽한 '룩'을 연출하는데 미숙했다. 조디 포스터는 1989년 영화 '피고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자리에 우스꽝스러운 나비 리본을 엉덩이에 단 드레스를 입고 나와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맥대니얼은 드레스 협찬 문화가 없는 이 블루오션에 뛰어들어 조디 포스터 같은 '촌닭'들을 집중 공략해 이들에게 아르마니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패션 전문지 '우먼스 웨어 데일리'는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을 '아르마니 시상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아르마니의 의도는 적중했고 레드카펫 마케팅 시작 이후 아르마니사의 1993년 매출은 4억4200달러로 1990년보다 2배나 늘었다.

2007년 10월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드레스는 김소연이 입었던 엠마뉴엘 웅가로의 화이트 드레스였다(좌). 지난 9월 열린 제4회 '서울드라마어워즈 2009'에서 고은아는 볼륨감 있는 몸매를 드러낸 드레스로 '리틀 김혜수'라는 애칭을 얻었다(우).


이제 레드카펫을 노린 명품 브랜드들의 경쟁은 그야말로 '레드 오션'을 이루고 있다. 유명 스타와 그 연인, 가족들을 파리와 밀라노 등지에서 열리는 패션쇼에 초대하고 그들에게 고가의 드레스와 보석, 시계를 선물한다. 스타의 스타일리스트들에게 지방 흡입 수술, 인테리어 개보수비 비용을 대주겠다고 접근하기도 한다.

패션 업계에서 레드카펫을 '총성 없는 핏빛 전쟁터'라 표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명품 브랜드의 구애는 '상품성'이 있는 소수의 여배우들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귀네스 팰트로는 여우주연상 수상이 유력시 됐던 1999년 제71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무려 100벌 이상의 드레스를 입어봐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일부 유명 스타들은 특정 브랜드의 의상 보석 구두 등을 걸치는 조건으로 10만 달러에서 25만 달러(약 1억2000만~3억원)의 현금을 요구했다고 토마스 기자는 전했다.

국내의 경우 레드카펫 드레스의 역사가 길지 않은데다 고급 드레스를 판매용으로 들여오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래서 시상식을 앞두고 명품 브랜드들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본사, 홍콩의 아시아퍼시픽 지사에서 드레스를 긴급 공수해온다. 이런 해외 명품 브랜드의 경우 반납이 필수적이다 보니 국내 여배우들은 할리우드와 달리 공짜 드레스는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레드카펫의 경제적 가치는 올라가고 스타들을 향한 브랜드의 구애도 치열해지는 추세다.

레드카펫은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때 바닥에 깔았던 카펫에서 유래했다. 레드카펫은 권력을 상징하는 셈이다.

아름다움과 권력과 환대를 상징하는 레드카펫 위에서 스타들은 '어설프게 귀족 흉내를 내는 천박한 존재'에서 '수백만 달러의 광고 가치를 지닌 권력'으로 달라진 위상을 한껏 만끽하고 있다.

'핏빛 전쟁터'의 승자는 그래서 디자이너도, 명품 브랜드도 아닌 스타들이다.

김현진 동아일보 주간동아팀 기자 brigh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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