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 감독은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있었던 스포츠동아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남아공월드컵을 앞둔 각오를 밝히고 있다.

허정무 감독은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있었던 스포츠동아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남아공월드컵을 앞둔 각오를 밝히고 있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3가지는 꼭 해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항공모함 함장, 오케스트라 지휘자, 그리고 야구 감독이다. 미국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것이다.

공통점이 있다. 세 직업 모두 부하들을 손 끝 하나로 지휘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세계 최대의 축제인 월드컵이 열리는 2010년, 축구대표팀 감독만큼 막강한 권력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 그리고 엄청난 압박감을 가진 자리가 또 있을까.

허정무 감독은 스포츠동아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월드컵이 끝난 후 부끄럼 없는 감독이 되고 싶다”는 말로 그 복잡다단한 심정을 전했다.
“월드컵 16강 자신있다”


○부끄럼 없는 감독 되고 싶어

허 감독은 월드컵과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1986년 월드컵 때는 선수로, 1990년 대회는 트레이너로, 1994년 월드컵 코치에 이어 이번에는 사령탑으로 참가한다.

그는 “이번 만큼은 터럭의 후회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월드컵은 늘 대회가 끝나고 나면 후회가 있었어요. 선수 때는 좀 더 잘해볼 걸, 코치 때는 상대를 더 잘 알았어야 했는데…. 월드컵이 열리는 해를 앞두고 설레기도 하고 중압감도 크죠. 하지만 어찌됐든 이번에는 모든 걸 다 쏟아 부어 끝나고도 후회하지 않고 싶어요. 내 능력 힘 에너지 모두 쏟아 부어야죠. 선수들에게 부끄럼 없는 감독이 되고 싶습니다.”

허 감독은 이 말을 하면서도 잠시 조심스러워 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대표팀에 쏠려 있는 이 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선수들에게 자칫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봤을 때 선수들도 너무 압박과 부담을 가져서는 우리 플레이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되도록이면 선수들에게 편한 모습을 보이려고 합니다. 교회에 가니 교인들이 다 같이 힘을 모아준다며 기도를 해주더라고요. 정말 참 많은 분들이 기대하고 계신다는 느낌이 다시 한 번 들었습니다.”


○전력분석이 하루 일과

연말연시 인터뷰와 감독을 모시려는 행사참여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거절하고 집에서 조용히 월드컵 구상이나 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 꼭 가야만 하는 곳만 골랐는데도 한 시도 쉴 틈이 없다.

이런저런 공식일정을 제외하고 나면 허 감독의 주된 일과는 다름 아닌 TV시청이다. 각국 해외리그 중계는 물론이고 같은 조에 속한 아르헨티나, 그리스, 나이지리아 비디오 분석에 열을 올리고 있다.

상대국 전력분석 자료는 구하는 대로 전부 가져오라고 해 뒀다. 그의 집 거실 한 쪽에는 DVD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꼼꼼히 체크한 DVD는 편집 작업을 위해 비디오 분석관에게 다시 보낸다. 주말이나 주중에 해외리그 중계를 보고나면 밤을 새우기 일쑤다.

허 감독은 “요즘에는 낮에 1∼2시간 청하는 잠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짬짬이 바둑도 두고 등산으로 머리도 식히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세계의 벽 넘을 때

‘한국의 1승 상대는 누구인가요?’ ‘16강에는 오를 수 있을까요?’ ‘몇 승 몇 무를 계획하고 계십니까?’ 허 감독이 늘 듣는 질문들이다.

“세 팀 가운데 못한 팀 하나도 없습니다. 분명히 강한 상대들입니다. 그러나 넘을 수 없는 벽은 아닙니다. 이제 한 번쯤 세계의 벽을 넘어설 시기가 됐다고 봐요. 이번 대회 정말 큰 의미가 있죠. 안방에서 열린 2002년에는 4강에 올랐지만 원정에서는 16강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한 그 숙제를 저와 선수들이 풀고 싶습니다.”

재차 다음 질문을 던졌다. “마음속으로 정해 둔 목표는 16강인가요? 아니면 더 나은 성적도 혹시 기대하고 계신가요?”

이에 대해 허 감독은 단호했다. “조별리그 통과가 지상목표입니다. 이것도 솔직히 이루기 쉽지 않죠. 선수단이 모두 합심이 되고 이런저런 시너지 효과까지 더해져야 가능한 목표입니다. 그 다음이요?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해외파, 대표팀 수준 끌어올릴 의무 있어

박지성(맨유)과 박주영(AS모나코) 등 일찌감치 선진리그를 몸으로 부딪히며 익힌 선수들이 있기에 이번 월드컵에 대한 기대가 더 큰 것도 사실이다.

최근에는 이청용(볼턴)도 맹활약 중이고 기성용도 스코틀랜드 명문 셀틱에 입성했다. 허 감독은 이들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중요한 임무가 있음을 강조했다.

“(박)지성이와 (박)주영에게는 아주 중요한 임무가 있어요. 자신들만 잘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죠. 대표팀 다른 동료들의 수준을 함께 끌어올려줘야 합니다. 동료들도 자신들을 대표팀의 구심점으로 생각하는 만큼 경험을 바탕으로 도움을 줘야죠. 특히 유럽 등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심리적인 부분에서는 그들의 역할이 더 큽니다.”

만일 박지성이나 박주영이 부상을 당한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이지만 만일을 대비한 복안은 있을까.

“예기치 못한 변수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비상시를 대비해 항상 스쿼드 경쟁을 시키는 것도 이런 이유죠. 선수들도 각자 부상에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박지성 아니라 메시나 호날두 같은 천하의 선수도 운동장에 뛸 수 있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부상당한 선수는 가치가 상실되는 겁니다. 다치면 잊어야죠. 그 선수는 제외시켜 놓고 생각할 겁니다.”
윤태석 기자 sportic@donga.com
사진 |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