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바닷길요트일주] “오메! 자네 왔는가”…잠깬 등대, 말을 걸다

입력 2010-01-2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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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센 폭풍우에 소리도에서 발이 묶여버린 집단가출호 선원들이 섬 트레킹에 나섰다. 소리도 등대로 올라가는 길 초입 억새밭 뒤로 푸른 바다가 파란 하늘, 흰 구름과 어우러졌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허영만 선장.

폭풍에 발이 묶인 집단가출호 선원들은 섬 트레킹에 나섰다
솔밭 넘어 동백숲 지나 닿은 곳 올해 백살, 소리도 등대 밤바다 항로를 밝혀온 한세기…
나는 누군가의 길잡이로 산 적이 있던가

전쟁같은 새벽이 지나고 날이 밝자 비는 그쳤으나 바람은 한층 사납다. 폭풍 속 사투를 벌인 네 명의 대원은 물론, 폐가가 된 여객선 대합실에서 야영하던 대원들까지 잠을 설쳤다.

스케줄대로면 오늘 소리도를 떠나 돌산도에서 박영석 대원과 합류한 뒤 다음날 남해 물건항까지 진출해야 한다. 이 정도 바람이면 항해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지만 항의 출입구인 방파제와 해안 암벽 사이 비좁은 수로에 거세게 이는 파도는 항구를 빠져나갈 엄두를 못 내게 했다.

무전 교신을 통해 수백톤급 큰 배들도 현재 피항 중이란 소식이 전해졌다. 허영만 선장은 ‘풍랑주의보가 해제될 때까지 대기’ 결정을 내렸다. 집단가출호의 항해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공치는’ 날을 맞게 된 것이다.

아침 겸 점심 식사는 닭죽으로 결정됐다. 시간에 쫓기는 평소 항해 같으면 꿈도 못 꿀 메뉴. 어촌계를 통해 놓아 기르는 닭 5마리를 사고, 장작불을 피울 수 있는 화덕과 커다란 솥을 구했다.

닭을 잘게 다져 마늘과 참기름으로 노릇하게 볶은 뒤 물을 넉넉히 잡고 한소끔 끓여 쌀을 넣었다. 이 요리 방법은 닭을 기르는 아주머니가 가르쳐준 소리도 스타일이다. 소리도 닭죽은 6월 항해 개시 후 대원들이 가장 배불리 먹은 최고의 성찬이었다.

바깥엔 차가운 북서풍이 미친 듯 부는데, 난방용으로 버너를 피운 여객선 대합실은 12명의 대원들에겐 비좁았지만 따뜻했고 닭죽은 맛있었다. 배가 부르고 시간이 남으면 인지상정으로 놀이거리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생각해낸 것은 윷놀이. 나뭇가지를 칼로 다듬어 뚝딱 윷을 만들고 나이를 기준으로 OB 대 YB로 팀을 나눠 대결이 벌어졌다.

벌칙은 설거지다. 기름기 있는 닭죽을 먹었으니 설거지가 만만찮아 윷놀이는 절대 봐주는 경우 없이 문자 그대로 피 튀기는 게임이 됐다. 왁자지껄 3전2선승제의 경기 결과 OB팀의 패배다.

“설마 그깟 윷놀이에 졌다고 선배들에게 진짜로 설거지를 시킬 건 아니겠지?”

“무슨 말씀? 약속은 약속이죠.”

허 선장과 김상덕, 이남기, 송영복 대원은 하는 수 없이 고무장갑도 없이 엄동설한 찬물에 설거지를 하느라 손이 홍당무처럼 빨개져야했다.

식사 후 대원 전원이 소리도 등대까지 왕복 약 7km의 트레킹에 나섰다. 마을을 벗어나 섬 정상부로 향하는 길은 외줄기로 뻗어 간결하고 호젓했다.

 거친 바다, 거친 파도…. 우리 앞에 펼쳐진 독도까지의 바닷길이 얼마나 더 험난할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중략>

“등대로 가는 길은 어느 길이죠?”

덕포마을 돌담집에서 물어보면

“전신주 따라가시오. 전신주도 그리 가오.”

논두렁 지나 솔밭을 넘어

검은 동백숲길을 뚫고 가면

하얀 집, 그 집이 내 집 같은데 아무도 없다

솔밭에서 날아온 새 한 마리 그밖엔

아무도 없다.

-이생진/등대 가는 길

시인이 어떤 등대를 소재로 쓴 것인지는 알지 못하나 소리도 등대 가는 길이 솔밭을 지나 동백숲을 거쳐 꼭 시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러했다.

올해로 100살이 되는 소리도 등대는 한 세기동안 남해 항로를 안내해 온 유인 등대다. 1903년 처음으로 불을 밝힌 팔미도 등대가 국내 1호 등대이고, 이어서 부도(1904), 거문도(1905), 우도(1906), 호미곶(1908), 말도(1908), 소리도(1910), 이어서 어청도(1912), 마라도(1915)에 차례로 등대가 들어섰다.

 남해를 내려다보며 고즈넉이 서있는 소리도 등대. 등대는 올해로 꼭 100년째 남해 항로를 지나는 배들의 길잡이 노릇을 묵묵히 해오고 있다.


등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남해의 쪽빛바다는 바람이 할퀴어 하얀 백파가 일었고, 뒤집힌 바다 위 수평선 어디에도 운항 중인 배는 없었다. 15년 전 씨프린스호의 대재앙이 있었던 소리도의 남쪽 해안은 해식애가 발달해 스케일이 큰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다음날인 12월 6일 일요일 오전 11시. 풍속은 여전히 15노트를 웃돌았으나 한낮에 가까워지며 바람 끝이 무뎌져 조심스럽게 항구에서 배를 뽑아냈다. 항을 빠져나가면 강풍에 돛을 펼치는 작업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 아예 돛을 열고 떠난다.

트인 바다로 나가자 바람도 강해져 배는 뒤로 물보라를 하얗게 일으키며 거의 모터보트의 속력으로 달린다. 힘찬 북서풍으로 남해 물건항까지는 태킹(tacking·맞바람을 뚫고 전진하기 위해 돛의 방향을 바꿔주는 일)없이 포트택(배의 왼쪽 전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항해하는 것)으로만 갈 수 있는 이상적인 풍향이다. 항해 개시 후 최고 속력을 기록하며 대원들은 환호를 질러댔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소리도 해안은 궁극의 풍경을 선사했다. 해안절벽도 아름답지만 강풍에 발생한 파도가 절벽의 발치에서 굉음을 내며 부서지는 장면에 모두들 넋을 잃었다. 섬의 남쪽을 돌아나갈 때 지형적으로 섬에 막혀 바람이 꼬였으나 섬의 영향권을 벗어나자 15노트로 총알같이 쾌속 항진이다. 속도가 빠른데다 5∼6m에 달하는 파도의 골짜기로 떨어질 때면 순간적으로 뱃머리가 잠수함처럼 물 속에 잠겼고, 그 때마다 갑판으로 물이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마스트에 몸을 묶고 촬영 중이던 다큐멘터리 담당 김기철 감독에게 초대형 물벼락이 쏟아졌다.

옷이야 젖으면 말리면 되지만 문제는 짠물과 상극인 카메라. 이미 굴업도와 우이도에서 두번이나 파도를 맞아 새로 구입한 카메라가 또 다시 횡액을 당한 것이다. 우리는 이 날 항해에서 동영상 카메라에 이어 스틸 카메라 한 대까지 추가로 바다에 바쳐야했다.

카메라 문제로 잠시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갈수록 심해지는 파도에 다시금 팽팽한 긴장 속으로 들어갔다. 이런 날씨에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헬멧과 고글이 필수 장비다.

배가 바람에 의해 기울어 있고, 너울을 오르내리게 되므로 언제 배 밖으로 튕겨져 나갈지 모르기 때문에 안전벨트와 생명줄도 물론 필수다. 돛이 팽팽해진 배는 오른쪽으로 약 30도 기운 채 거친 바다를 예리하게 베어나갔다.

오후 4시. 드디어 물건항이 보인다. 항 뒤편 산기슭에 오밀조밀 자리 잡은 독일인 마을이 예쁘다. 마중 나온 남해요트학교 강사들의 안내로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남해 물건항에 뱃머리를 들이민 것은 4시 30분. 바람은 여전했지만 동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물건항은 아늑해 바람과 싸우며 건너온 집단가출호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줬다.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cafe.naver.com/grouprunway

사진=이정식 스포츠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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