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부, 장종훈(왼쪽부터). 스포츠동아DB
“연습생 시절 한마디 한마디가 금쪽 조언”
고원부와 장종훈은 1985년 빙그레 입단 동기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입단동기일 뿐 당시 상황은 하늘과 땅차이보다 컸다. 스물 셋이었던 고원부는 일본 난카이 호크스(현 소프트뱅크)의 최고 유망주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로 1군 승격이 좌절되자 눈물을 머금고 한국에 건너온 재일교포. 반면 세광고를 갓 졸업한 장종훈은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연습생이었다.
이미 일본프로야구의 물을 먹은 고원부는 이듬해부터 정식으로 리그에 합류하는 창단팀 빙그레의 핵심 전력이었다. 반면 장종훈은 일손이 부족한 신생구단에서 배팅볼도 던지고 불펜에서 투수들의 공도 받아주는 역할, 말이 연습생이지 월급 40만원을 받는 훈련보조요원이었다.
하루에 단 한차례라도 배트를 휘두르고, 단 1개의 공이라도 던졌다면 희망을 가졌을지 모른다. 연습은 꿈도 못 꾸고 뒤치다꺼리에 정신없는 하루에 장종훈은 “딱 1년만 하고 그만둬야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만약 그 때 고원부가 없었다면 1990년대 프로야구 최고스타 장종훈은 다른 직업을 갖고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고원부는 장종훈을 볼 때마다 환한 미소로 등을 두드리며 격려했다. 그 밝은 웃음에는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는 메시지가 가득했다. 깊은 좌절과 서러움에 이미 야구를 포기했던 장종훈은 고원부를 대하며 조금씩 마음이 달라졌다. 그리고 고원부가 전해주는 타격기술과 마음가짐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장종훈은 이듬해 2군 선수가 됐고 다시 1년 후 1987년 1군에 데뷔했다. 그리고 4년 만에 홈런왕, 다시 2년 후에는 시즌 41호 홈런을 날리며 한국 프로야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정식 선수가 된 뒤에도 고원부는 장종훈을 잊지 않았다. “땅볼로 안타 칠 생각하지 말고 공 띄우는데 집중해봐”라는 한마디에 장종훈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장타력에 또 한번 눈을 떴다. 이 말은 후에 다시 장종훈을 통해 김태균에게 전해지기도 했다.
장종훈은 2005년 유니폼을 벗었다. 그의 등번호는 한화 최초로 영구결번으로 지정됐고 모든 관중은 일어나 한 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가장 영광스러운 그 순간 장종훈은 “고원부 선배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며 그때 받은 희망을 연습생 신화로 보답했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