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영광만 남기고 사라진 비디오게임 개발자들

입력 2010-08-05 18:2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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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게 빛났기에 더욱 아쉬운 별들의 몰락
우리들 주변을 살펴보면 떵떵거리며 기세를 떨치던 사람이 어느 시점을 계기로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되는 경우를 많이들 접하게 된다. 학창시절에 반에서 잘 나가던 급우가 학교 졸업 이후에 영향력을 상실하는 경우나 말 실수 한 마디에 인기를 모조리 잃어버린 연예인처럼 말이다.

운동선수건 영화배우건 소위'스타'라 불리는 인물들이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관련 분야에서 자신의 힘을 잃는 것은 보는 이들에게'저런 사람들도 실패할 수 있구나'라는 신선함과'쯧쯧... 그렇게 잘 나가던 사람이 어쩌다가...'와 같은 씁쓸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이러한 경우는 게임 업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게임 업계에도'스타'로 불리는 관계자들이 존재한다. 이런'스타'들은 게임업계에서 찬란하게 빛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도 하며, 수명을 다한 별들이 폭발해 사라지듯이 순식간에 업계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 3D 시대의 개척자, 3D 시대에 저물다

일본의 게임 개발사 세가(SEGA)는 과거 80년대와 90년대에는 아케이드와 비디오 게임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등 다방면에 있어서 큰 영향을 떨치던 게임 업계의 맹주였다.

그런 세가를 있게 한 장본인이라면 역시 세가의 대표적인 개발자스즈키 유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회사에 입사하고 2년 만에'행온','스페이스 헤리어' 등의 체감형 게임을 개발해 3D 공간에 대한 개념을 게임에 도입하는가 하면, 3D 레이싱 게임인'버추어 레이싱'으로 게이머들에게'폴리곤'이라는 개념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또한'버추어 파이터' 시리즈로 2D 일변도였던 대전 격투 게임 시장에 3D 개념을 도입해 대전 격투 게임 시장의 흐름을 2D에서 3D로 전환시킨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최근 당연시되고 있는 3D 그래픽을 대중화 시키고 보급한 선구자적인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앞서 말한대로스즈키 유는 남들보다 뛰어난 기술력은 물론이거니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 게임을 주로 출시했다. 그러한 시도는 언제나 성공으로 마무리 됐으며, 이러한 도전정신은 그를 세계 최고의 개발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도전정신이스즈키 유의 발목을 붙잡게 된다. 단지스즈키 유 본인의 발목 뿐만이 아니라, 세가라는 거대 기업의 발목까지 함께 붙잡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중심에는스즈키 유의 도전정신의 결정체인'쉔무'가 있었다.

'쉔무'는 당시에는 생각하기 힘든 규모를 갖춘 게임으로, 실시간으로 작용하는 인물들의 관계와 다양한 액션, 영화 같은 시나리오와 당시 최고 수준의 그래픽으로 무장한 액션 어드벤처 게임. 세가는'쉔무'를 앞세워 당시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자사의 하드웨어'드림캐스트'를 부흥시킨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쉔무'의 게임성은 매우 뛰어나, 다양한 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쉔무'는 세가에 명예를 가져다주는 게임이 됐다. 하지만 수익을 가져다주는 게임은 아니었다.

쉔무의 생소한 개념은 게이머들에게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왔으며, 이런 부담감은 게임의 대중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결국 700억 원에 달하는 개발비를 들인'쉔무'는 일본 내에서 75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데 그치고 말았다.

많은 돈을 들였지만 기대이하의 성과를 낸 세가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드림캐스트 역시 플레이스테이션 2에 밀려 사양길에 접어드는 불운을 맞게 된다.스즈키 유는 이후에도'쉔무 온라인'의 실패 이외에 착수하는 프로젝트마다 실패하는 결과를 보이며 결국 지난 2009년 4월에 최종 퇴사처리 되고 말았다.

특이한 점이라면 여러 차례의 프로젝트를 연달아 실패한 개발자는 게이머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스즈키 유의 퇴사 소식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게이머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 치명적인 실수, 하지만 업계에 남긴 너무나 거대한 족적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 바로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이하 SCE)의 前CEO인 쿠다라기 켄을 수식하는 말이다.'플레이스테이션 1, 2'의 연타석 홈런으로 당초 가전제품과 음향기기 전문업체로 이름을 알리고 있던 소니를 비디오게임 업계 최강자로 이끈 남자에게 이런 수식어가 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쿠다라기 켄은 앞서 언급한 스즈키 유와는 엄밀히 말하자면 전혀 다른 세계의 인물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였던 스즈키 유와는 달리 쿠다라기 켄은 하드웨어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엔지니어 출신이기 때문이다. 슈퍼패미컴의 사운드 칩을 개발하기도 했던 쿠다라기 켄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뭐니해도'플레이스테이션 1, 2'의 디자인과 관리감독을 도맡았다는 것이다.

강력한 지배자가 존재하는 업계에 후발주자가 뛰어들어 사업을 벌인다는 것이 얼마나 실패 확률이 높은 일인지, 대중들은 잘 알고 있다. 업계를 불문하고 그런 사례가 워낙 많다보니 애초에 후발주자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플레이스테이션'과'쿠다라기 켄'은 그런 시장 상황을 헤치고 1위 자리에 오르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게이머들은 이러한 성과를 이끌어 낸 그에게 열광하기 시작한다.

'플레이스테이션 1'은 세가의'새턴'과 닌텐도의'닌텐도64'라는 강력한 대항마를 쓰러트렸으며,'플레이스테이션 2' 역시 MS의'Xbox'와 닌텐도의 '게임큐브'를 상대로 시장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이런 성과의 바탕에는 쿠다라기 켄의 개발 능력과 마케팅 능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쿠다라기 켄은 지난 2007년 은퇴를 선언한다. 본인이 선언한 은퇴라지만 SCE 측의 문책성 좌천으로 인해'명예회장' 자리에 오른 이후 선언한 은퇴이기에, 게이머들에게는 사실상'해고'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극적인 몰락의 원인은 야심차게 준비한'플레이스테이션 3'와'PSP'의 부진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 3'는 경쟁사인 MS의'Xbox360'보다 1년 가량 늦게 출시 됐음에도, 그다지 뛰어난 성능을 보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보다 문제가 된 것은 쿠다라기 켄이 '플레이스테이션 3'를 홍보하면서 언급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모두 허언이 됐다는 것이다.

전세계의'플레이스테이션 3'를 연동해서 연산 작업을 펼치며 게임기가 진화할 것이라는 '그리딩 컴퓨팅' 이론과 폴리곤보다 뛰어나다는 '셀 연산' 이론은 그 효용성을 내비치기는 커녕 실용성에서도 의심을 받았다. 또한 '진동패드는 구시대의 유물'이라며 새롭게 선보인 '육축패드'는 그 실효성과 성능이 너무나 떨어져 게이머들로부터 외면받았고, 결국 진동 기능을 추가한 '듀얼쇼크 3'를 출시해 사실상의 패배선언을 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게다가 고가의 가격으로 출시하진 않겠다는 발언과는 반대로 제품의 초기 출시 가격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는 바람에 시장 진입 속도가 너무나 더뎠으며, 이런 쿠다라기 켄의 발언과 행동에 배신감을 느끼는 게이머들까지 나타났다.

'PSP' 역시 경쟁작인 '닌텐도DS'에 밀려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쿠다라기 켄이 생각한'PSP'의 컨셉은 게임기와 멀티미디어 기기가 혼합된 형태의 기기였으나, 대중은 다소 고가의 'PSP'보다는 게임 기능에 충실하고 가격도 저렴한'닌텐도DS'에 열광한 것이다.

결국'플레이스테이션 2'를 1억대나 판매하며 업계 최고의 수익을 얻던 SCE는 이러한 악재로 인해 급격하게 무너지며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적자라는 단어와 직면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복된 실패에 남아있을 수 있는 기업인은 없을 것이다. 쿠다라기 켄 역시 그러했고, 그는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비록, 씁쓸한 은퇴를 했지만 비디오게임 업계에서 그가 미친 영향력은 지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은퇴 이후 비디오게임계의 아카데미 시상식으로 비유되는'AIAS'(Academy of Interactive Arts and Sciences)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AIAS'의 조직위원장이 그를 설명한 말은 쿠다라기 켄이 게임업계에 어떤 영향을 미친 인물인지를 잘 설명해준다.

"쿠다라기 켄은 홈 엔터테인먼트 그 이상을 구체화 시킨 인물이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그 누구도 이러한 성과는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디자인과 소프트웨어 제작을 통해서만이 게임 산업에 위대한 공헌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람이다"



* 너무나 짧은 시간 동안만 빛났던 천재, 이이노 겐지

세가의'메가드라이브'와 닌텐도의'슈퍼패미컴'으로 대변되던 16비트 게임기 시대가 저물고 32비트 게임기 시대가 도래하던 90년대 초반, 음악을 전공하던 한 남자가 비디오게임 시장에 폭풍을 몰고 왔다. 바로 3DO로 출시됐던'D의 식탁'의 개발자 이이노 겐지가 그 주인공이다. 본래 음악을 전공했던 개발자답게 그는 게임에'사운드'라는 측면을 극대화시킨 작품으로 게이머들을 사로잡았다.

'D의 식탁'은 그 당시에는 매우 생소했던 장르인 인터랙티브 무비로 미쳐버린 병원장의 딸이 병원에 들어가 사건을 해결한다는 호러물이다. 플레이 타임은 2~3시간 남짓이며 저장도 되지 않아 게이머들에게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의 긴장감을 제공하는 이 게임의 장점은 역시나 게임의 분위기를 극대화시키는 음향효과에 있었다. 게임 자체의 참신함과 적절하다 못해 혀를 내두르게 하는 음향효과는 게이머들에게'이이노 겐지'라는 이름을 깊이 각인시켰다.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소리를 이용한 전투를 전면에 내세운'에너미 제로'와 시각장애인을 위한 게임인'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 등 청각적인 면에 호소하는 게임을 만들어내며'게임은 시각적인 콘텐츠'라는 기존의 통념을 통째로 엎어버리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후 그가 선보이는 게임들은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3종의 게임 이외에 3DO로 출시한 게임들은 대부분 실패했으며, 드림캐스트로 야심차게 출시했던'D의 식탁 2' 역시 참신함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게이머들로부터 실망스러운 반응을 얻는 데 그쳤다.'D의 식탁'이 게임성 그 자체보다는 기존에 볼 수 없던 파격적인 신선함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D의 식탁 2'에는 그런 파격적인 부분이 부족했다는 것이 일각에서의 평가다.

결국 스튜디오 와프는 해체했으며 이이노 겐지의 이름도 그렇게 사라져갔다. 그의 아이디어와 음악적 역량을 탐내는 업체에서 그를 스카우트 하려는 노력도 기울였지만, 지나치게 강한 이이노 겐지의 자기애 때문에 번번히 무산된 것도 그의 경력이 더 이어지지 못하게 된 원인이었다.

혹자는 그를'과대평가된 천재'라고 칭하기도 한다.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평가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3종의 게임 이외에는 모두 처절한 실패를 맞이 했으며, 그 이후의 경력 역시 일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픽에 집중하던 게임 시장에 사운드라는 측면을 부각시켜, 게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해줬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이노 겐지가 대단했던 사람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김한준 게임동아 기자 (endoflife81@gamedong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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