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조벡]‘패션 바이블’ 클로에 세비니 “난 봉준호 감독 팬이예요”

입력 2010-11-12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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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제작된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클로에 세비니의 이름을 널리 알린 영화다.

어쩌면 여배우 클로에 세비니(36)는 본업인 영화배우보다 패셔니스타로 세상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활발히 활동하는 미국 내에서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그는 콧대 높은 패션 매거진들마저 숭배해 마지않는, 몇 안 되는 할리우드 패션 아이콘으로 통한다.

그의 이름을 포털에서 검색하면 그가 여태껏 출연한 영화의 작품 이름보다는, 최근에 입은 의상의 브랜드 이름이나 시상식 레드카펫 위에서 선보였던 드레스에 대한 정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저 전담 스타일리스트들이 입혀 주는 대로 온몸을 명품 브랜드만으로 도배하는 배우들과 달리 그는 하이패션 브랜드와 스트리트 브랜드를 자유롭게 '믹스 앤 매치'해 입는 스타일링의 귀재다.

패션에 대한 그의 모험과 관심은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일찍이 뉴욕의 전설적인 패션 부티크 '리퀴드 스카이'의 단골고객이었고 영국의 아방가르드한 패션지 i-D의 모델이었던 그다.


▶ 스타일 바이블, 연기로도 교과서감

모델 출신 배우 김민희는 한국의 패션 매거진들의 '뮤즈' 같은 존재다. 그런 그 역시 세비니를 스타일 롤모델로 꼽는다.

이쯤 되면 세비니가 이 시대의 패션 아이콘임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의 연기를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그가 그저 패션으로만 주목을 받는 것은 억울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연기자로서 그의 재능은 확실히 특별하다. 그는 누가 맡아도 예뻐 보이고 그럴 듯한 역할보다는 자신이 아니면 안 될 역할을 골라 연기하는 배우다.

세비니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영화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Boys don't cry)'이다.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온 지 10년이 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당시 혜성처럼 나타난 배우 힐러리 스웽크와 클로에 세비니의 등장을 필자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저예산 독립영화였기에 겨우 수십 개의 소극장에서만 개봉됐던 이 작품은 입소문을 타고 미 전역에서 선보였고 유력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최근 한국의 패션 브랜드 '빈폴'이 미국의 디자이너 브랜드 '밴드 오브 아웃사이더즈'와 협업해 런칭한 새로운 라인의 모델로 선정된 클로에 세비니.


개봉 이듬해인 2000년 3월 열린 제7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스웽크는 여우주연상 후보에, 세비니는 여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됐다. 스웽크의 수상에 이어 세비니 역시 트로피를 거머쥐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지만 행운의 여신은 '처음 만나는 자유(Girl, Interrupted)'의 안젤리나 졸리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세비니는 사석에서 필자에게 이렇게 귀띔했다. "그 때 잔뜩 기대를 했던 것이 사실이었어요. 졸리의 수상 배경에는 영화계 거물인 그의 아버지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믿기도 했고요. 그래서 시상식이 끝나기도 전에 그 곳을 뛰쳐나갔어요. 그땐 아주 어렸을 때이니까요. '내가 제일 연기 잘 했는데, 왜'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하하!"

그러나 수상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레드카펫 위에서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사람은 디자이너 랜돌프 듀크의 드레스를 멋지게 소화한 스웽크였지만, 세비니는 패션지에 몇 차례 오르고 만 그와 달리 이날 아예 패션의 역사를 새로 썼다.

세비니는 시상식을 위해 전문 스타일리스트를 한시적으로 고용하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자신이 직접 시상식 드레스를 골랐다. 그리고 당대 가장 잘 나가는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고르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당시 패션계에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던 한 남자의 의상을 선택했다.

이런 위험한 선택에 주위 사람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의상은 전 세계 패션 피플의 찬사를 이끌어냄과 동시에 잊혀져 가던 그 디자이너에게도 다시 한번 관심을 집중케 했다.

그 디자이너가 지금의 패션계를 호령하는 '랑방'의 디자이너 앨버 앨바즈다. 당시 세비니가 입었던 드레스가 '랑방' 은 아니었다. 당시 앨바즈는 경영부진으로 고전하던 '이브 생 로랑'의 디자이너였고, 그 시즌을 끝으로 '이브 생 로랑'은 결국 이탈리아의 패션 그룹 '구찌'에 매각되는 운명을 맡게 됐다.

당시 마지막 시즌을 준비하는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앨바즈는 평소 친분이 깊던 세비니에게 70년대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이브 생 로랑'의 블랙 홀터넥 드레스를 제작해주었다.

그 드레스 하나로 '재능은 출중하지만 운이 없어 저주 받은 디자이너'로 동정 받던 앨바즈는 다시 한번 세계 패션의 중심에 섰다. 패션잡지 보그의 미국판 편집장 안나 윈투어는 이 일련의 상황을 목격하고 세비니에 대해 '격렬히 추락하는 디자이너를 구해낸 여배우'라는 평가하기까지 했다.

2000년 열린 제7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세비니. 그는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당시 쇠퇴하던 브랜드 '이브 생 로랑'의 디자이너 앨버 앨바즈의 블랙 홀터넥 드레스를 입으면서 디자이너와 본인의 이름을 드높이게 됐다.



▶ "봉준호 감독 영화는 빼 놓지 않고 봐"

올 9월 중순 어느 날 미국 로스앤젤레스 웨스트 할리우드 지역에서 약간 벗어난 한 스튜디오에서 필자는 세비니를 다시 만났다. 그와 뉴욕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공적인 목적으로 만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이전에는 늘 뉴욕에서, 사적으로 어울려 지냈던 그다.

이번 촬영은 한국의 패션 브랜드 '빈폴'이 미국의 디자이너 브랜드 '밴드 오브 아웃사이더즈'와 협업해 런칭한 새로운 라인을 위한 것이었다. 필자는 광고 캠페인 전반의 아트 디렉션을 의뢰받았고 세비니는 이 라인의 모델로 선정됐다. 당시 세비니는 LA에서 HBO 채널의 히트 시리즈 '빅 러브(Big Love)'를 촬영하고 있었다.

한국 패션계에서는 아직 흔하지 않은 브랜드끼리의 협업, 즉 '컬레보레이션 브랜드'라는 시도에 세비니도 큰 관심을 보였다. 혹시 한국 패션이나 브랜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파리에서 활약 중인 이상봉과 우영미의 컬렉션을 본 적은 있지만 아직 잘 알지는 못한다"며 정말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반면 "한국 영화를 얼마나 아느냐"는 질문에는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봤어요.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뉴욕 필름 페스티벌에서 상영한 봉 감독의 '마더'도 직접 가서 본걸요. 박찬욱 감독도 재능 있다고 생각하고 김기덕 감독 영화도 많이 봤어요. 최근에 보기 시작한 홍상수 감독 영화도 흥미로운 면이 있었어요."

영화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눈을 초롱대는 그는 천상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패션에 대한 열정도 남다르지만 배우로서 연기라는 기본기가 탄탄하기에 패션에 대한 열정 또한 더 높게 평가받는 것이리라.

뉴욕 매거진의 제임스 맥키너니는 일찍이 클로에 세비니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쿨한 여성 (The coolest girl in the world)'라고 명명했다. 나 역시도 그의 말에 두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싶다. 그야말로 '유사품'을 찾기 힘든, 색깔이 분명한 '오리지널'이기 때문이다.

연기에서든 패션에서든 자신만의 노선이 분명한 그는 분명 이 시대를 대표하는 '쿨한 여성'이다.

조벡 패션 광고 크리에이티브디렉터· 재미 칼럼니스트 joelkimbec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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