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컴퓨터 오래 보지 마라. 눈 나빠진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잔소리다. 국민 2명 중 1명이 안경을 끼는 저시력 시대, 영유아를 키우는 부모들 입장이라면 TV 앞에 바짝 붙어 있는 아이들을 타박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성 세대들이 들은 잔소리가 ‘그냥 커피’라면,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이 들을 잔소리는 ‘원두 커피’가 될 것으로 보인다. 3D TV와 3D 게임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TV나 PC 화면을 가까이에서 보거나 오래 보면 시력이 나빠진다는 속설에는 의학적인 근거가 없다. 물론 눈의 피로로 인해 일시적으로 시력이 저하되는 가성 근시가 발생할 수는 있지만, 이는 약물과 생활요법을 병행하면 치료가 가능하다(물론 이 가성 근시를 진성 근시로 착각해 아이들에게 안경을 씌워주기 시작하면 진성 근시로 굳어질 수는 있다).
그렇다면 20년 전보다 안경 착용자가 2배나 늘어난 현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전문가들은 늘 가까운 곳을 봐야 하는 도시생활이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한다. 눈이 가장 좋은 종족으로 알려진 몽골족의 경우, 넓은 초원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평균 시력이 4.0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사물이 밀집해 있는 도심에서는 1미터 이내의 사물을 쳐다볼 일이 많아 근시가 생길 확률이 높다는 설명이다. 즉, TV나 PC가 눈에 피로를 주는 것은 맞지만, 반드시 근시의 주 원인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3D 영상은 어떨까. 현재 3D 영상을 시청한 사람들 중 두통이나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종종 보고되고 있다. 지난 해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송종석 교수가 발표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눈의 피로도는 일반 TV보다 3D TV가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 TV를 시청할 경우 평균 78.57분만에 눈의 피로를 느낀 반면, 3D TV를 시청할 경우 평균 54.86분만에 피로를 느낀다는 것. 송 교수는 “3D 영상은 일반 2D 영상에 비해 두통과 눈의 피로를 더 빨리 일으키는 만큼 더 많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이 결과만으로 3D 영상이 시력을 저하시킨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일시적인 피로감과 영구적인 시력 저하는 분명히 다른 문제기 때문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어린 아이들에게 3D TV와 3D 게임을 허락해도 괜찮을 것인가.
닌텐도, “3D 영상은 어린이의 눈에 영향 미친다”
논란의 불씨는 닌텐도가 지폈다. 닌텐도는 지난 해 12월 자사의 홈페이지에 3D 영상이 어린이의 시력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요지의 경고문을 게재했다. 이 경고문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3D 영화와 3D TV를 포함한 모든 3D 영상은 어린이의 눈 성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에 닌텐도는 자사의 3D 게임기인 닌텐도 3DS에 어린이의 시력을 보호할 수 있는 2D 영상 전환 기능을 제공하고 있으며, 부모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보호자 사용 제한 기능’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이 경고문은 전 세계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3D 영상이 6살 미만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문구에 구체적인 의학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소니 등 다른 3D 영상기기를 만드는 기업들도 경고문을 고지하고 있지만, 대부분 ‘아이들은 의사와의 상담을 받은 후 이용하라’는 정도의 문구만을 삽입했다. 닌텐도처럼 3D 영상이 시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직접적으로 밝히는 행동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닌텐도 3DS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파문이 잦아들지 않자 닌텐도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지난 9일 닌텐도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를 통해 “닌텐도 3DS가 아이들에게 위험하다는 뜻이 아니라, 시력을 보호하기 위한 예방 차원에서 경고문을 삽입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와타 사토루 닌텐도 대표는 “우리는 판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보라고 할지라도 적극적으로 소비자들에게 고지하고 있다”며 “향후 벌어질지도 모를 법적인 소송을 막기 위해 자진 납세를 한 것은 맞지만, 그게 핵심적인 이유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와타는 경고문에 언급한 ‘전문가들’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닌텐도 3DS란?
닌텐도 3DS는 닌텐도 DS의 후속 모델로, 올해 4월 정식 출시를 앞둔 휴대용 게임기다. 3D 안경과 같은 주변기기 없이 맨눈으로 3D 영상을 즐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3D 영상을 구현하는 방식에는 적청안경\(Anaglyph) 방식, 셔터글라스(shutter glasses) 방식, 편광안경(Polarized glasses) 방식, 크로마뎁스(ChromaDepth) 방식, 패럴랙스 배리어(Parallax barrier) 방식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기본 원리는 비슷하다. 두 개의 눈에 각각 다른 이미지를 투영시켜 사람의 뇌가 입체 영상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방식이다. 이미지를 어떻게 분리하느냐에 따라 방식이 나뉠 뿐이다.
적청안경 방식은 한쪽 렌즈는 붉은색, 한쪽 렌즈는 푸른색인 특수 안경을 사용한다. 붉은색 렌즈에서는 붉은색 이미지가 보이지 않고 청색 이미지만 보인다. 반대로 청색 렌즈에서는 붉은색 이미지만 보인다. 이 방식은 초기 3D 영상에 많이 사용됐지만 지금은 사장되는 추세다. 모든 이미지를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나누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색깔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셔터글라스 방식은 특수 안경을 통해 양쪽 눈을 교대로 가리는 방식으로, 주로 3D TV에서 많이 사용된다. TV에서 왼쪽 눈과 오른쪽 눈에 맞는 영상이 번갈아 상영되면 특수 안경의 렌즈가 이에 맞춰 교대로 어두워졌다 밝아진다. 화질이 좋고 시야각이 넓다는 장점이 있지만, 깜박거림으로 인한 피로감이 심하다는 단점도 있다.
편광안경 방식은 특정 방향으로 진동하는 두 개의 편광을 이용한 것으로, ‘아바타’와 같은 3D 영화에서 주로 쓰인다. 편광안경의 각 렌즈에는 편광필터가 장착되어 있어 반대쪽 영상은 렌즈를 통과할 수 없다. 최근에는 편광안경 방식을 채택한 3D TV도 나오고 있는데, 이는 TV 디스플레이에 편광필름을 부착해 이미지를 둘로 나누는 방식을 사용한다. 눈의 피로감이 적은 편이고 안경의 무게도 가볍지만, 셔터글라스에 비해 해상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패럴랙스 배리어 방식에는 안경이 필요하지 않다. 특수하게 제작된 디스플레이 때문이다. 이 디스플레이에는 무수히 많은 구멍이 뚫린 ‘패럴랙스 배리어’가 덧씌워져 있는데, 이 구멍으로 보이는 픽셀이 미묘하게 엇갈려 있어서 양쪽 눈에 다른 이미지가 들어오게 된다. 닌텐도 3DS, 샤프 3D TV 등에서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안경을 쓸 필요가 없어 간편하지만, 시야각이 좁다는 단점이 있다.
안과 전문가들, “3D 영상 해롭지 않다”
닌텐도의 경고문이 화제가 되자, 안과 의사들도 논란에 가세했다. 이들은 지난 5일 뉴욕타임스를 통해 “3D 영상이 아이들의 눈에 해롭다는 닌텐도의 주장에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워싱턴 대학에서 소아과 및 안과 교수로 재직중인 로렌스 타이크슨(Lawrence Tychsen)은 3D 영화와 3D 게임은 시력에 전혀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3D 영상이 시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갓 태어난 털원숭이들에게 3D 안경을 씌우는 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3개월간 매일 3D 안경을 착용했던 아기 원숭이들의 시력은 다른 원숭이들과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원숭이의 시력 발달 과정은 인간과 매우 흡사하다고 덧붙였다.
하버드 대학의 안과 교수 데이빗 헌터(David hunter)도 이에 동의했다. 그는 넓은 의미에서 3D 영상은 실제 인간의 눈이 만들어내는 진짜 입체 영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오히려 그는 시력 저하보다 3D 영상으로 인한 피로가 극심하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우려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소아과 교수 데이빗 그라넷(David Granet) 역시 과도한 정보를 담고 있는 3D 영상으로 인해 아이들의 주의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지적했다. 그가 몸담고 있는 미국 소아과 아카데미는 2살 이전의 영아들에게는 TV 영상 시청을 금지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라넷은 “부모들은 어린 아이들이 3D 게임을 하는 것 자체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더 큰 문제는 3살배기가 게임을 하도록 방관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3D 영상과 시력 저하와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소위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조차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일반 소비자들의 혼란은 오죽할까. 그러나 시력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3D 영상이 아이들에게 과도하게 노출되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해진다. 잔소리의 내용을 바꾸면 된다.
“3D TV, 3D 게임기 오래 보지 마라, (눈은 모르겠지만) 머리 나빠진다.”
글 /IT동아 서동민(cromdandy@itdonga.com)
※ 포털 내 배포되는 기사는 사진과 기사 내용이 맞지 않을 수 있으며,
온전한 기사는 IT동아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사용자 중심의 IT저널 - IT동아 바로가기(http://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