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매체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다.
‘가장 좋아하는 팬의 유형은?’이라는 질문에 1위는 한결같이 응원하는 팬, 2위는 먹을 것 등의 선물을 자주 주는 팬, 3위는 예쁜 팬이었다.
아니, 경기장에서 열심히 응원하면 되지, 재력에 비주얼까지 겸해야 선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니! 한껏 투덜대자니 어쩌면 팬들이 선수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경기에서 보여주는 훌륭한 플레이보다도, 운동장 밖에서 내게 보여준 눈짓, 미소 하나에 그 선수를 좋아하게 되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그라운드에서 친 만루홈런은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누리게 되지만, 내게 웃어 주던 그 순간은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니 말이다.
우리 어머니의 예를 들어본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야구 선수는 넥센 소속의 송지만 선수인데, 한평생 이글스만 응원해 온 어머니가 다른 팀 소속의 선수를 좋아하게 된 에피소드가 있다. 몇 년 전, 어머니와 함께 야구장에 갔을 때 경기가 우천으로 취소되면서 선수들이 짐을 챙겨 퇴장하게 됐다.
스탠드 맨 앞줄에 있는 우리 가족 앞으로 송지만 선수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반가운 마음에 “앗! 지만이 오빠!”라고 외치셨는데, 놀랍게도 그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관중석을 바라보더니 모자를 벗어 가슴에 올리고 공손히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의 돌발 행동에 당황하던 나는 송지만 선수의 진실하고 예의바른 모습에 더욱 놀랐고, 그때부터 송지만 선수는 우리 어머니에게 ‘완소지만’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야구에 푹 빠지게 된 계기도 그라운드 밖에서 만난 선수에게 반해서였다.
철없던 고등학생 시절, 무작정 집으로 찾아간 나에게 햄버거를 사주며 “야구도 열심히 보고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말해 준 멋진 오빠 정민철(현재 한화 투수 코치)이 아니었다면, 야구는 내게 한때의 열정이나 취미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손톱만큼의 귀찮은 내색도 없이 시종일관 웃어 주던 그 모습은, 야구팬 하기 버겁다고 느낄 때마다 나를 지탱해 준 힘이기도 하다.
물론 선수들 입장에서는, 한두 명도 아닌 팬들에게 매번 웃어 주거나 사인, 사진 촬영에 응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컨디션이 나쁘거나 경기 결과가 좋지 않을 때는 팬들이 귀찮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방 50미터 앞에서부터 가까이 오지 말라는 ‘아우라’를 풍기거나, 응원의 말을 건네는 팬들에게 곁눈질 한번 없이 선물만 수거해 가거나, 기다리는 팬들을 피해 36계 줄행랑을 치는 선수는 그가 아무리 대단한 플레이를 보여준다 한들 사랑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기껏 좋아해 온 야구까지 한순간에 싫어질 수도 있다. 본시 사랑이 크면 외면당한 설움도 깊기 마련 아닌가.
흔히 야구팬은 야구를 존재하게 하고 숨쉬게 한다고,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것은 야구팬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너에게 해줬기 때문에 너도 나한테 이렇게 해 달라고 바라는 게 아니라, 다만 팬을 존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진실한 눈빛과 행동을 보여줬으면 한다. 적어도 팬과 선수는 프로야구라는 커다란 배를 함께 타고 있는 ‘동지’이니 말이다.
구율화 변호사
야구선수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법과 제도 마련에 관심이 많다. 야구계 변방에서 꾸준히 팬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
[스포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