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사는 법] 이은승 안산공고 감독 “저 놈 물건이네”…김광현 발굴한 족집게

입력 2011-03-2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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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없었다면 SK 김광현의 야구인생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스포츠동아 창간특집 인터뷰에서 안상공고 이은승 감독이 추억이 담긴 
상패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작은 사진은 청소년야구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있는 김광현(오른쪽)과 안산공고 이은승 감독.

그가 없었다면 SK 김광현의 야구인생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스포츠동아 창간특집 인터뷰에서 안상공고 이은승 감독이 추억이 담긴 상패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작은 사진은 청소년야구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있는 김광현(오른쪽)과 안산공고 이은승 감독.

유년시절 치고 때리는 재미에 야구 눈떠
중앙대 김희애 보려고 원광대 스카우트도 거절
스무살 데뷔전 패전투수로 프로1군 플레이볼
끝내 1군 1승 못 잡고 8년만에 프로 마침표

공주고 거쳐 안산공고서 두번째 지도자의 길
숙소서 4시간 자고 야간연습만 6시간 지옥훈련
‘국가대표 만들겠다’ 김광현 서울진학 원천봉쇄
“광현이 입단 첫해 첫승땐 제 속이 다 뻥 뚫렸죠”
이은승. 1971년 2월12일 충남 공주 출생. 공주고를 졸업한 우완투수, 1989년 빙그레에 입단해 한화를 거쳐 1997년 은퇴. 프로 1군에서 40경기에 등판해 방어율 6.22, 0승2패1세이브, 72. 1이닝 투구. 1991년 2군 북부리그 다승 1위(6승3패1세이브)…. 스포츠동아는 창간 3주년 특집으로 이런 성적을 남기고 은퇴한 선수를 만났습니다. 왜일까요? 이은승의 이야기 속에서 수긍할 수 있는 답변이 얻어지기를 바랍니다.


#1…육상 선수 꿈꾸던 소년, 야구를 만나다


충남 공주 소년 이은승이 야구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다. 원래 육상을 했는데 치고 때리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바꿨다. 막상 야구부에 입단하니 방학에도 훈련을 시키고 너무 힘들어서 관두려고 했다. 친구들하고 낚시 다니는 편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관두려면 그동안 먹었던 우유하고 빵값 다 내라”는 선생님의 협박(?)에 할 수 없이 다시 야구를 했다. 아버지는 네 살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 홀로 5남매를 키웠는데 막내인 이은승이 운동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중학교를 거쳐 공주고에 입학했다. 볼은 빠르지 않았어도 슬라이더는 자신 있었다. 고교 2학년 때부터 원광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고사했다. 중앙대에 가고 싶어서였다. 이유는 하나. 중앙대에 가면 연극영화과에 다니는 배우 김희애와 만날 수 있을까 해서였다. 당시 충청 지역에서 라이벌이 대전고 구대성이었다. 구대성이 한양대를 졸업한 4년 후 한화에서 재회했다. 허준, 손차훈(현 SK 운영팀 매니저)이 당시 친구들이다.

공주고 시절 이은승에게 잊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고교 은사인 김정무 전 한화 운영팀장이다. 은퇴 후 공주고∼안산공고에 자리를 마련해준 은인이다. 이은승이 안산에 가지 않았다면 김광현(SK)의 야구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또 한 명은 박찬호(오릭스)다. 공주고 후배 박찬호는 유독 이은승을 따랐다. 한양대를 다니던 박찬호가 불쑥 이은승을 찾아온 날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박찬호는 “만약에 제가 메이저리그로 간다면 어떨까요?” LA 다저스와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나중이었다. 이은승은 망설임 없이 권했다. “가라. 우리보다 100년 역사가 앞선 곳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말렸어도 박찬호는 미국에 갔을 것이라 믿는다. 인연은 참 기구해서 이은승이 은퇴를 결심했을 때 상의한 사람이 박찬호였다. 박찬호는 “미국은 마흔에도 뛴다”고 만류했지만 이 때는 이은승이 이겼다.
안산공고 이은승 감독(왼쪽)은 지금도 제2의 김광현을 탄생시키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제자들을 열성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모습. 아래 사진은 ‘코리안특급’박찬호(왼쪽)가 유독 따르던 선배가 바로 이 감독(가운데). 이 감독이 공주고 시절 까까머리가 
인상적인 박찬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안산공고 이은승 감독(왼쪽)은 지금도 제2의 김광현을 탄생시키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제자들을 열성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모습. 아래 사진은 ‘코리안특급’박찬호(왼쪽)가 유독 따르던 선배가 바로 이 감독(가운데). 이 감독이 공주고 시절 까까머리가 인상적인 박찬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2…데뷔전서 역전패…“아! 얄궂은 프로인생이여”

1989년 1월 연고지명으로 계약금 500만원에 빙그레에 입단했다. 당시 1순위 지명을 받았던 송진우(현 한화 코치)가 4000만원이었으니까 꽤 큰 금액이었다.

프로에 처음 들어갔을 땐 2군밥이 당연했다. 김영덕 당시 감독은 이은승을 유난히 귀여워했다. 나이 스무 살에 맞은 9월의 어느 날, 오매불망하던 프로 1군 데뷔전이 이뤄졌다. 빙그레가 4∼5점 앞서던 7회부터 등판이었다. 대전구장에서 열린 삼성전이다. 이미 대세가 기운 경기에서 9회까지 막아서 세이브를 따라는 배려였다.

그런데 마운드에 오르니 야구를 한 이래 처음으로 떨렸다. 외야수와 내야수 선배들은 뭐에 홀린 듯 연속 에러가 나왔다. 믿어지지 않게도 9회 경기가 뒤집혔다. 데뷔전에서 대역전패, 이은승은 패전투수로 야구인생을 시작했다. 충격은 컸지만 그 이후 끝까지 1승의 기회가 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


#3…내 인생의 만루홈런! 제자 광현이를 찜하다


은퇴 후 모교인 공주고 코치로 갔다. 조동화(SK) 조동찬(삼성) 송광민(한화)이 당시 제자다. 모시던 전임 감독이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 징계를 받았다. 졸지에 감독이 없어진 상태에서 대행이 됐다. 그런데 성적이 나니 예기치 않은 일이 터졌다. 전임 감독과의 사이가 미묘해졌다.

결국 떠나게 됐다. 야구를 시작한 30년 만에 처음, ‘백수’가 됐다. 그렇게 3개월을 지냈는데 김정무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다. 안산공고에 가보라고. 처음엔 그런 학교가 있는지도 몰랐다. 2000년 야구부가 창단된 학교였다. 20 01년 여름 코치 부임에 앞서 봉황기를 관전했다. 경북고에 20점을 주고 콜드게임으로 졌다. 소위 야구명문고에 진학이 불발된 선수가 모인 외인구단 같은 팀이었다.

처음 아이들과 대면했을 때 말했다. “너희들이 야구 잘하면 안산공고 왔겠냐? 팀으로 뭉치자.” 해법은 훈련밖에 없었다. 이은승은 4시간만 숙소에서 자고 야간연습만 6시간을 시켰다. “실미도”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첫해 졸업생이 이우선(삼성)이다.

학교에는 스카우트 전권을 달라고 했다. 그 첫해 뽑은 아이가 김광현이었다. 안산중앙중 투수, 마른 체구의 스리쿼터. 첫눈에 팔각도만 올리면 물건이 될 거라고 알아봤다.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광현이와 아버지의 마음을 돌렸다. 서울에 있는 학교로 보내려고 완강했던 어머니는 직접 찾아가 “이은승 이름을 걸고, 꼭 국가대표로 만들어 드리겠다”고 약속해서 허락을 받아냈다. 학비와 야구를 하는 부대비용 전액은 무료였다. 그러나 광현이 아버지는 입단이 확정된 후 찾아오더니 “학비를 다 내겠다”고 했다.

지금도 광현이가 단 1구만 던져도 그날 컨디션을 알 것 같다. SK 입단 후 1승도 못하고 3패를 거듭할 때, 딱 한번 광현이를 불렀다. 그때 만남 뒤 거짓말처럼 2007년 6월 광주 KIA전에서 첫 승을 거둘 땐 자기 한이 풀린 후련한 느낌이었다. 이은승에게 김광현은 9회말 역전 만루홈런이다. 이은승이 터뜨린 홈런볼은 지금도 하늘을 날고 있다.안산 |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 |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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