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비오는 날, 강된장과 봄나물이 만났다…

입력 2011-05-3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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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변산 노적마을에서 만난 강된장 보리비빔밥. 국물을 극소량으로 잡아 진하게 끓인 강된장은 쌈장 대신 써도 좋을만큼 짭짤하고, 된장의 풍미를 강하게 부각시킨 음식이다. 요즘은 고추장 비빔밥이 대세지만 보리밥은 강된장으로 비볐을 때 제맛을 낸다. 2. 구비구비 내변산 횡단도로를 달리다 만난 이정표. 허영만 화백은 “동네 이름 참 좋다”며 “자매결연이라도 맺어야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1. 내변산 노적마을에서 만난 강된장 보리비빔밥. 국물을 극소량으로 잡아 진하게 끓인 강된장은 쌈장 대신 써도 좋을만큼 짭짤하고, 된장의 풍미를 강하게 부각시킨 음식이다. 요즘은 고추장 비빔밥이 대세지만 보리밥은 강된장으로 비볐을 때 제맛을 낸다.

2. 구비구비 내변산 횡단도로를 달리다 만난 이정표. 허영만 화백은 “동네 이름 참 좋다”며 “자매결연이라도 맺어야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9.군산∼변산<상>
■ 청림리 노적마을 ‘강된장 보리비빔밥’

이 비를 뚫고 떠난다고?
방수재킷 걸친 대장이 야속해
앞도 잘 안보이는 고갯길
샤워 레이스에 뼛속까지 한기

악!!!이럴수가!!!
이길이 아닌가봐
설상가상 잘못 접어든 코스



에라 모르겠다 그대로 GO
우린 뜬구름 같은 자전거 식객!


떠나야 하나? 이 비를 뚫고?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종일 적지 않은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빗나가기를 기대한 간절한 바람은 결국 헛된 일이었다.

집단가출 자전거전국일주 아홉번째 구간 출발점인 전북 부안군 변산면 변산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 빗발은 오히려 더 굵어져 있었다. 바닷바람에 밀려 사선을 그리며 흩뿌리는 빗줄기가 목덜미에 닿자 한기가 느껴져 소름이 좍 돋는다.

차에 싣기 위해 떼어놓았던 자전거 바퀴를 조립하는 멤버들의 손길이 마치 학교가기 싫어하는 초등학생이 마지못해 책가방을 챙기듯 굼뜨다. 모두 곁눈질로 허영만 대장의 눈치를 살핀다.

혹시나 대장의 입에서 ‘오늘은 날씨가 나빠 라이딩 포기’라는 말이 떨어질까 하는 기대를 품고…. 그러나 방수재킷을 꼼꼼히 챙겨 입은 대장은 야속하게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먼저 자전거에 올라타 출발했다. 어미를 따르는 새끼 오리들처럼 대원들이 뒤를 이었다.

우중(雨中) 라이딩은 처량하고 꿉꿉했다. 출발하자마자 얼굴이 젖었고 이어서 장갑이 질척해진다. 설상가상 젖은 노면을 구르는 바퀴에서 튀어 오른 빗물이 엉덩이와 신발까지 흠뻑 적셨다.

하지만 무엇이든 처음이 힘들 뿐 시간이 지나면 적응하게 마련이다. 조금이라도 덜 젖기 위해 잔뜩 움추린 채 어기적거리며 페달링을 하던 대원들은 고갯길로 접어들며 몸에서 열이 나자 평소처럼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쏟아지는 비 때문에 고글이 뿌옇게 되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 고글을 쓰고 있자니 렌즈에 빗물이 묻어 앞이 잘 안보이고, 벗으면 빗방울이 눈으로 직접 들어와 역시 시야 확보가 어렵다.

“고글 렌즈에 자동차 앞 유리창처럼 와이퍼가 달려있는 것은 왜 없냐?”는 객쩍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전거 행렬은 비 내리는 변산국립공원을 관통하는 736번 도로를 허위허위 달려간다. 앞사람의 뒷바퀴에서 튀는 물방울은 간격을 띄우면 피할 수 있었으나 내 자전거의 앞바퀴에서 수직으로 솟구치는 물은 피할 길이 없다.


● 빗길 라이딩 악전고투…설상가상 길도 잘 못 들어

두 번째 고갯마루를 넘어 내리막길을 쏟아져내려가다 나타난 이정표를 보고 필자는 속으로 비명을 지를 만큼 놀랐다. 남여치. 원래 계획한 코스는 변산을 왼쪽에 두고 달려 마동삼거리를 거쳐 곰소항으로 진출하는 것이었으나 엉뚱한 곳이 나타난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고사포를 지나 마포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했어야했는데 한발 앞서 변산면사무소에서 좌회전을 해버렸다. 공교롭게도 가야할 길과 잘못 든 길의 도로 번호가 같아 정신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와 짙은 안개 속에서 들머리를 놓쳐버린 것이다.

뜬구름처럼 흘러가는 우리의 자전거 여행이 꼭 특정한 길로 가야한다는 법은 없지만 문제가 심각한 것이 잘못 든 이 길은 부안의 명소 곰소항을 들르지 못하고 줄포로 가버린다는 점. 게다가 주행거리도 두 배 이상 길다. 팀의 네비게이터로서 코스를 잡아가는 역할을 하는 필자로서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아야할지를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쫄딱 젖은 채 이를 악물고 달리는 멤버들의 얼굴을 보자 “이 길이 아닌개벼”라는 얘기를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이미 한참 잘못 든 길을 돌아갈 수도 없어, 마오쩌뚱의 어록에 나오는 ‘비는 내리고 어머니는 시집간다(天要下雨 娘要嫁人 由他去)’를 떠올리며 영문도 모른 채 엉뚱한 코스로 접어든 멤버들을 이끌고 어쩔 도리 없이 내쳐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코스 실패는 또 하나의 문제를 던졌다. 점심 끼니때를 지났는데 변산을 오른쪽에 두고 북동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도로상에서는 변변한 식당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줄창 달리는 동안 빗줄기는 더욱 거세져 마치 샤워를 하며 자전거를 타는 형국.

남여치를 지나 중계리 터널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통과중인 집단가출 자전거일주팀. 빗속의 라이딩은 체온을 많이 빼앗겨 내리막보다는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오르막이 차라리 좋았다.4-5. 집이란 사람의 온기가 없으면 빠른 속도로 망가진다. 비교적 멀쩡한 한옥이 무슨 사연으로 폐가가 됐는지 알 수 없으나 비에 쫓긴 나그네들에게 훌륭한 피난처가 됐다. 허영만 화백이 툇마루에 앉아 잡초 우거진 마당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남여치를 지나 중계리 터널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통과중인 집단가출 자전거일주팀. 빗속의 라이딩은 체온을 많이 빼앗겨 내리막보다는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오르막이 차라리 좋았다.

4-5. 집이란 사람의 온기가 없으면 빠른 속도로 망가진다. 비교적 멀쩡한 한옥이 무슨 사연으로 폐가가 됐는지 알 수 없으나 비에 쫓긴 나그네들에게 훌륭한 피난처가 됐다. 허영만 화백이 툇마루에 앉아 잡초 우거진 마당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양푼에 보리밥 넣고 쓱쓱, 혀가 웃었다

장마처럼 퍼붓는 비·비·비…
양철지붕 폐가로 긴급대피
한숨 돌리고 다시 빗속 페달질
앗! 식당…일단 들어가고보자

몸 노곤하게 풀릴 즈음
상 위엔 푸짐한 나물에 강된장
양푼에 한가득 보리밥

아! 어머니의 손맛
이곳이 맛 1번지 변산반도라네

5월이고, 여름을 재촉하는 비라고 하지만 산악지대에서 맞는 비는 몹시도 차가워 뼛속까지 한기가 파고드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허기가 밀려오자 라이딩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간다. 간단히 칼로리를 보충할 행동식은 각자 준비했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비를 피할 곳과 따뜻한 음식이었다.

이제 그만 잦아들어도 좋으련만 시간이 갈수록 퍼붓는 비에 대원들은 지쳐가고 있었지만 내변산의 아름다운 풍광은 먹구름 아래서도 무심히 빛난다.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변산 골짜기마다 운해가 깔렸는데 우리의 자전거는 고개를 넘을 때마다 선계인 듯한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가 고개를 내려오면 깨쳐난 짙푸른 산빛 속에서 허브 라쳇의 톱니바퀴에서 나는 까라락 소리와 함께 골짜기의 불어난 물과 함께 달렸다. 골짜기 물은 거울처럼 맑아 산허리를 가로지른 도로에서 내려다보면 바닥의 돌과 모래가 투명하게 드러나 젖은 채 덜덜 떨면서도 눈길을 떼지 못한다.

변산 풍경의 또 하나의 축은 보리밭이다. 지난 겨울 모진 추위를 이기고 굳세게 자란 청보리가 이리저리 휩쓰는 바람에 몸을 누이며 그려내는 몽환적인 무늬들은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에 얻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상서면 사지동에 이르자 길은 순해졌으나 비는 마치 장마철이라도 되는 듯 기세를 올렸다.

마을이 있어 비를 그을 곳을 찾았으나 몇 채 안되는 집들은 모두 처마가 짧고 빗줄기가 횡으로 들이쳐 마땅치 않았다.


● 빗길 고행서 만난 강된장 보리비빔밥

“저기 빈 집 같은데?”

허영만 화백이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훔쳐내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벌겋게 녹슨 양철지붕을 인 한옥 한 채가 산자락 아래 납작하게 엎드려있다. 마당엔 잡초가 우거지고 댓돌 사이로 제법 굵은 오동나무가 멋대로 자라있는 것으로 보아 폐가가 된 지 족히 수년이 흐른 듯한 집의 툇마루로 올라가 앉았다.

버려진 집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낙수가 고즈넉해 갈 곳 없는 나그네들이 비를 피하기엔 더 없이 좋다. 폐가의 툇마루에 둘러앉아 비스켓과 사탕으로 요기를 하고나자 다시 빗속으로 나가 자전거를 타는 것이 끔찍하게 여겨진다.

여기서 그저 한없이 머물고만 싶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정처 없이 흐르는 자전거 유목민들. 왔으면 떠나는 것은 숙명이어서 달콤한 쉼을 접고 또 다시 나선 길에 비는 여전히 세차게 쏟아졌다.

‘대가가든’이라는 간판이 붙은 식당을 만난 곳은 청림리 노적마을에서였다. 워낙 한적한 곳인데다 궂은 날씨에 손님이 있을 리 없어 식당은 텅 비어있다.

음식 맛이 불안했으나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중년의 안주인에게 메뉴에 적힌 것 중 가장 빨리 준비되는 것을 물어보니 강된장에 보리비빔밥이란다. 그나마 밥을 새로 지어야 했으므로 전기장판의 온기에 노곤해질 쯤에야 상이 차려졌고 반찬들이 상 위에 깔리고 있을 때 이미 안주인의 음식 내공이 느껴졌다.

뚝배기에 바특하게 끓인 강된장의 강렬한 향과 함께 정갈하지만 푸짐한 나물들을 보는 순간 식욕은 저항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양푼에 담긴 보리밥에 두릅, 가시오가피순, 호박꼬지, 콩나물에 고사리를 척척 올린 뒤 강된장을 넣고 비벼먹으며 우리는 비로소 미각의 고장 전라도에 와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호남 출신인 필자의 어린 시절 강된장은 직접 가열하지 않고 뚝배기에 담아 밥을 지을 때 밥 위에 올려놓고 일종의 중탕가열로 완성했다. 그렇게 하면 습기를 잃지 않아 된장의 구수한 내음이 살아있었는데 아득한 시절 어머니의 손맛을 변산반도의 한 식당에서 만나는 것은 작은 감동이었다.

강된장 보리비빔밥에 힘을 얻은 전국일주팀은 보안면, 줄포면을 거쳐 남으로, 남으로 파죽지세로 내달렸다. 하루 종일 괴롭히던 비는 흥덕면에 이르렀을 때에야 잦아들었다.

사진|김경민 포토그래퍼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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