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석 기자 여기는 베이루트] 레바논 “월드컵 냄새라도…”

입력 2011-11-1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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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국가대표 축구팀 조광래 감독. 스포츠동아DB

같은 숙소·식당 사용
식당 할당 크기도 3분의1 수준
그라운드 잔디는 울퉁불퉁
여기저기 담배꽁초까지

브라질 기자
“한국 이기면 6만5000관중 불감당”
휴대폰 매장 직원
“져 주면 스마트폰 꽁짜” 유혹

“월드컵 냄새라도 맡아보고 싶다.”

레바논이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의 단꿈에 젖어 있다. 레바논은 11일(한국시간) 쿠웨이트 원정에서 1-0 승리하며 B조에서 2승1무1패(승점 7)로 한국(3승1무·10)에 이어 2위로 올라섰다. 레바논 입장에서는 15일 벌어지는 한국과 월드컵 3차 예선 5차전 홈경기 결과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이들이 최종예선에 얼마나 나가고 싶어 하는지를 베이루트 곳곳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대표팀은 경기 이틀 전인 13일 결전지 스포츠시티 스타디움에서 레바논 입성 첫 훈련을 소화했다. 경기장에서 하는 훈련은 원래 하루 전인 14일 해야 하지만 레바논축구협회가 하루 빨리 훈련하는 게 어떠냐고 양해를 구했고, 조광래호가 이를 받아들였다. 취재진도 13일 훈련을 보기 위해 결전의 장소를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브라질 기자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2014브라질월드컵을 앞두고 중동 축구를 오래 취재해 왔다는 그는 “경기 당일이면 6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스포츠시티 스타디움이 꽉 찰 것이다. 만약 한국이 레바논을 이기면 관중들로부터 엄청난 압박에 시달릴 것이다”고 말했다. ‘무사히 돌아가고 싶으면 알아서 하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실제 레바논 관중은 다혈질로 유명하다. 레바논은 지난달 11일 쿠웨이트와 홈경기에서 2-2 비겼는데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폭죽과 레이저 빔을 쏘는 바람에 두 차례나 경기가 중단됐다. 스포츠시티 스타디움 본부석을 마치 성처럼 보호하고 있는 두꺼운 방탄유리가 레바논 관중의 성향을 대신 말해주는 듯 했다.

외적인 분위기도 무시 못 한다. 레바논은 시내 여기저기에 내전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 있다. 장갑차와 탱크로 무장한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 모습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 진다.

축구협회 관계자도 황당한 일을 겪었다. 그가 현지 휴대폰 구입을 위해 매장에 갔더니 점원이 대뜸 “경기에서 져 주면 최신형 스마트 폰 하나를 공짜로 주겠다”며 “월드컵 냄새라도 맡아보는 게 우리의 소원이다”고 말했다는 것.

레바논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46위로 아시아에서도 축구의 변방이다. 월드컵은 고사하고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 진출한 것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만큼 월드컵에 대한 갈증이 크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레바논의 이런 환상을 단숨에 깨뜨릴 수 있는 최대 적이 한국이 됐다. 그래서일까. ‘공공의 적’ 한국대표팀을 맞이하는 레바논축구협회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 한국은 레바논의 텃세에 베이루트 도착 첫 날부터 애를 먹고 있다.

두 대표팀이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것부터 비상식적이다. 한국이 4층, 레바논이 6층을 쓴다. 베이루트 시내에 이곳 말고는 대표팀이 사용할 만한 일급 호텔이 없다니 그렇다 치자. 호텔 내에 하나 뿐인 식당을 두 팀이 나눠 쓰는데 한국에 할당된 크기가 레바논의 3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 선수들은 밥을 먹으면서 옆 사람과 부딪혀 불쾌할 정도다.

그러나 그라운드 잔디를 보면 호텔에서의 불편함은 양반이다. 잔디는 월드컵 예선이 벌어지는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표면이 고르지 못하고 군데군데 패인 것은 물론 여기저기 담배꽁초까지 널려 있었다.

그나마 한국을 도와주는 건 기후뿐이다. 베이루트는 현재 한국의 전형적인 가을 날씨와 비슷하다.

윤태석 기자 sportic@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Bergkamp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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