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코리아’에 디자인은 없다?

입력 2011-11-18 12: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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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김치냉장고의 디자이너는 누구?

얼마 전 국내 한 대기업이 대학원생과의 디자인 소송에 휘말려 언론에 보도됐다. 삼성전자가 겨울 시즌을 앞두고 김치냉장고 판촉전에 나서면서 실제 제품 디자인에 참여한 대학원생이 아닌 해외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제품을 홍보해 보다 못한 해당 대학원생이 소송에 나선 것.
(2011년 10월 29일 동아일보 보도: http://news.donga.com/3/all/20111029/41481349/1)


이 대학원생은 지난 해까지 삼성전자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패턴 디자인(무늬)에 관한 용역 계약을 맺고 일했는데, 최근 인터넷에서 자신의 디자인이 들어간 삼성전자의 김치냉장고를 발견했다. 그런데 정작 제품에는 자신이 아닌 유명 해외 디자이너가 디자인 한 것으로 명기되어 있었고, 자신의 디자인이 무명도 아닌 차명으로 둔갑한 현실에 소송에 나서게 됐다. 법원은 이 대학원생의 승소를 인정해 삼성전자가 3,000 만원의 손해 배상을 치르기로 하면서 소송은 일단락되었지만, 이 소송건은 현재 우리의 디자인 모럴리티(morality, 도덕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21세기 신경쟁 동력으로 ‘디자인’이 떠오르면서 정부는 물론 재계와 기업이 앞다투어 디자인에 전폭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지난 해 서울특별시가 세계디자인수도로 지정된 것이나 해마다 디자인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것 등이 그 예다. 이제 ‘디자인 코리아’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캐치프레이즈가 되었다.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자체 디자인연구소를 부설 기관으로 두고 있으며, 대학 내 산업 디자인 관련 학과의 인기도 식을 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디자인 코리아에서 ‘디자인권’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디자인권이란?

‘디자인권’은 공업 소유권의 일종으로서 디자인을 등록한 자가 그 등록 디자인에 대해 갖는 독점적ㆍ배타적 권리를 말한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으나, 실제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수 많은 제품이나 서비스 등에 이 디자인권이 적용되며, 특정 디자인을 최초로 고안해 등록한 사람은 그 디자인에 대해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디자인 저작물 및 이에 관한 권한의 범위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매우 미흡해, 위 사례와 같이 디자이너가 뒤바뀌는 경우는 허다하게 벌어지는 실정이다. 더구나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디자인을 카피하기가 점차 쉬워지고 있어 디자인권 침해의 실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디자인권 침해 비일비재


감각적인 디자인이 결정적인 경쟁 요소가 된 가전 및 IT업계에서는 이러한 디자인 카피 사례가 더욱 자주 등장하고 있다. 노트북이나 PMP, MP3 플레이어 등에서 한 가지 디자인이 인기를 끌면 모방 제품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지기 마련이다. 얼마 전 회전 날개를 없앤 신개념 선풍기인 다이슨 사의 ‘에어 멀티플라이어’의 경우 파격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주목 받았으나, 얼마 후 수십 만원 이상 가격 차이가 나는 ‘짝퉁’ 제품이 출시돼 시장을 점유했다. 이후 다이슨 사는 유사품 제조 중단에 관한 가처분 신청을 냈으나, 여전히 시장에서는 디자인 모방 제품을 어렵게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상 디자인 고안자 입장에서는 디자인 모방보다 억울한 것이 앞선 삼성전자의 사례와 같이 디자인 저작권자가 뒤바뀌는 일이다. 일본 자동차 업체 도요타를 대상으로 20년 이상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자동차 부품 개발업체 사장 재일 교포 오야마 씨 역시 디자인 도용으로 억울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지난 1981년, 자동차 콘솔박스 위에 씌우는 ‘암레스트’라는 팔걸이를 개발해 도요타에 납품해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이후 도요타가 그와의 거래를 중단하고 직접 만든 팔걸이를 장착한 자동차를 출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요타가 만든 팔걸이는 오야마 씨의 것과 육안으로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유사한 디자인이다.

이처럼 디자인 저작권을 침해 당하는 당사자가 대부분 순수 창작 디자이너 또는 중소기업 경영자라는 점은 디자인 업계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일이 길고 외로운 싸움일 뿐 아니라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더불어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도 여의치 않다. 앞서 삼성전자를 상대로 소송한 대학원생은 “내 이름을 쓰지 않아도 좋지만 다른 유명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나가니 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라며, “디자이너로서 최소한의 자존심과 권리를 찾고 싶었다”라고 심정을 밝혔다.

디자인 수준 하향 평준화 우려

디자인권이 침해되기 쉬운 현실은 결국 국가의 디자인 수준을 하향 평준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우수한 디자이너들이 독창적인 디자인을 창작하려 하기 보다는 유명 디자인 제품을 모조하거나 모방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창작물이 유사 디자인 제품으로 인해 평가절하되는 현실에 등을 돌리게 된다.

디자인이 21세기의 진정한 성장 동력이라면 디자인권에 대한 우리 모두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 디자인 산업 육성을 넘어서 민관 공조로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우수한 디자인과 디자이너들이 존중 받을 수 있는 풍토를 형성해 개인, 기업, 나아가 국가 디자인 경쟁력까지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할 것이다.

글 / IT동아 이문규 (munch@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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