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그들을 말한다] 두산 권명철 코치 “95년 OB 우승때 마지막 소방수가 나야”

입력 2011-11-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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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 권명철 코치가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친정팀으로 돌아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뒤로 하고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 그의 얘기를 들었다.스포츠동아 DB

4. 두산 권명철 코치

OB ‘V2’ 7차전 마무리 영웅
아! 하지만 영광은 그때까지만

2005년 지도자로 제2 야구인생
“영광·좌절의 경험 코치하는데 큰 도움”

1995년 10월 22일 잠실구장, OB와 롯데의 한국시리즈 7차전. OB가 4-2로 앞서 있던 7회초 선발 김상진이 첫 타자 공필성을 몸에 맞는 볼로 출루시키자 당시 사령탑이었던 김인식 한국야구위원회(KBO) 규칙위원장은 권명철을 마운드에 올렸다. 김 규칙위원장은 “김상진의 수비가 불안했다. 상대가 번트를 댔을 때 땅볼 타구를 잘 처리할 수 있는 권명철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회상했다. 선발등판 후 이틀만의 등판. 모험일 수 있었지만 선수는 감독의 믿음에 부응했다. 무사 1루에서 1사 2루가 됐지만 대타 이종운을 유격수 땅볼로 처리한 뒤 3루로 뛰던 선행주자마저 잡으며 이닝을 종료했다. 9회초에는 투아웃을 잡아놓고 연속안타, 패스트볼로 2사 2·3루의 위기에 몰렸지만 대타 손동일을 또 한 번 투수앞 땅볼로 처리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덕분에 OB는 82년 원년우승 이후 오랫동안 걸어왔던 암흑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정작 팀의 2번째 우승을 일궈낸 주인공은 이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98년 해태로, 2000년에는 신생팀 SK로 이적했고, 2003년 다시 친정팀으로 돌아왔지만 2년 만에 유니폼을 벗었다. 그럼에도 OB팬들 가슴 속에는 권명철, 이름 석 자가 아로새겨져 있다. 김선우가 올시즌 팀내 토종선발투수로는 95년(김상진 16승·권명철 15승) 이후 16년 만에 15승(16승7패)을 달성하며 재조명된 권 코치를 만났다.


친구 따라 야구하게 된 꼬마

“코치님, 야구 잘 하셨네요.”올해 두산전을 앞둔 LG측 잠실 덕아웃. 권 코치와 선수들은 전광판에 상영되고 있는 95년 한국시리즈 명장면을 보고 있었다. 권 코치가 타구를 잡아 1루로 송구하며 우승을 결정짓자 LG 선수들은 코치를 향해 존경 어린 시선을 보냈다.

권 코치가 야구를 시작한 건 우연한 기회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생긴 야구부에 친구를 따라 입단테스트에 갔다가 혼자만 붙었다. 어릴 때는 타격에 소질이 많아 부르는 곳이 많았다. 당시 인하대 오공탁 감독이 중학생임에도 밀어서 홈런을 치는 권 코치에게 “고등학교 가지 말고 바로 대학으로 오라”고 농담을 건넬 정도.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본격적으로 투수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이스가 됐고 92년 2차 1번으로 OB 유니폼을 입었다.

슬라이더를 기가 막히게 던졌던 권명철 코치의 OB 시절 역투 모습. 스포츠동아DB



한화 류현진과 같은 투구스타일

“슬라이더가 일품이었고 묵묵하게 자기 할 일을 했다.” 김 규칙위원장은 ‘선수 권명철’을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배터리를 이뤘던 김태형 현 SK 배터리코치도 “제구력이 안정적이었다. 특히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에 타자들이 꼼짝을 못 했다”고 칭찬했다. 이어 “변화구가 좋으려면 직구가 좋아야 한다. (권)명철이가 평균구속은 낮았지만 제구가 잘 된 묵직한 공을 던졌다”고 했다.

이뿐만 아니다. 김 규칙위원장은 “손재간이 좋은 투수들이 있는데 (권)명철이가 그런 선수였다”고 했다. 김 코치 역시 “일단 큰 체격에 비해 유연했다. 공을 설렁설렁 던지는 것 같은데 볼끝이 묵직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한화 류현진과 비슷한 투구스타일이었다. 던지는 템포도 빨랐고 심지어 포수가 사인을 늦게 내면 화를 냈다”고 귀띔했다.


화려한 불꽃을 태우고 쇠락의 길로

권 코치의 범상치 않은 재능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류택현(당시 OB)은 95년 덕아웃에서 선수들과 함께 새로 연마한 변화구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권 코치는 그립을 알려달라고 했고 불펜에서 장난삼아 던졌다. 하지만 이게 웬일. 그의 손을 떠난 공은 직선으로 날아가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뚝 떨어졌다. 그는 그렇게 반포크볼을 장착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1995년까지였다. 이듬해 군에 입대하며 2년이라는 공백이 생겼다. 94년까지만 해도 방위병은 한정적으로 경기에 뛸 수 있었지만 그가 입소하기 직전 시행법이 바뀌었다. 제대 후 팀에 복귀했지만 설 곳이 없어 결국 99년 해태로 트레이드.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적 첫 해 시범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등판했지만 베이스커버를 들어가다 한화 이영우와 부딪혀 발목이 골절됐다. 재활로 시간을 허비하다 2000년 창단된 SK로 이적했으나 이렇다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다시 두산(2003)행.

“2004년에는 경기에 거의 나가지 못 했지만(5경기 출장) 주장을 맡아서 구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많이 배웠죠. 그때 2년과 2009시즌 후 갔던 일본연수(소프트뱅크·라쿠텐)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 선수 권명철에서 지도자 권명철로

그는 2005년부터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9년까지 두산 2군에 있다가 지난해 LG로 넘어가 올해까지 최계훈 코치와 함께 투수진을 보살폈다. 하지만 시즌 후 김진욱 신임감독의 부름을 받아 또다시 친정집으로 컴백.

“힘들었지만 그때 했던 고생이 코치를 하는 데는 도움이 돼요. 지도자로서 지향점이요? 아직 배우는 단계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요. 옛날 방식을 고수하지는 않을 겁니다. 선수들의 약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장점을 살리는 쪽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요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누구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조명이 꺼진 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야했던 비운의 스타. 하지만 그의 곁에는 늘 야구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와 야구는 함께 걸어갈 예정이다.


● 권명철 코치는?

▲ 생년월일=1969년 10월 28일

▲ 출신교=서화초∼동인천중∼인천고∼인하대

▲ 키·몸무게=183cm·94kg(우투우타)

▲ 경력
- 1992년 OB 입단
- 1999년 해태(트레이드)
- 2000년 SK 이적
- 2003년 두산∼2005년 두산 코치
- 2010년 LG 코치∼2011년 두산 코치

▲ 통산 성적=247경기 45승45패 4홀드 1세이브, 방어율 3.93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hong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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