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그들을 말한다] 김상엽 코치 “150km 직구+파워커브…거칠게 없었지”

입력 2011-12-20 07: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삼성에 몸담던 시절, 푸른 피의 에이스로 통했던 김상엽은 NC 다이노스 투수코치로서 제2의 인생을 꽃피우려 도전한다. 스포츠동아DB

9. NC 김상엽 코치


고졸 2년차땐 12승·18S…삼성 에이스로
96년엔 사상 두번째 억대 연봉자 등극
탈난 어깨…부상·부활에 ‘격년제’ 오명도
코치로 프로 복귀…“우승 못한 한 풀 것”


푸른 피의 에이스. 2002년 처음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올리기 전까지 삼성의 에이스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는 비운이다. 1982년 원년 한국시리즈에서 OB 김유동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우승을 내준 이선희, 한국시리즈만 앞두면 교통사고와 부상으로 힘겹게 마운드에 올라야 했던 김시진…. 그리고 여기에 한 명 더, 정상에 서지 못한 최고의 투수가 있었다. 1988년 겨울, 삼성에서는 묘한 엇갈림이 있었다. 당시 고교졸업 신인 중 최대인 15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한 명의 신인 투수가 입단했다. 김상엽.

대구고 에이스로 10년간 에이스로 활약할 수 있는 재목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유명 대학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그 해 겨울 1980년대 중반 삼성의 에이스였던 김시진이 롯데로 트레이드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년 후, 그동안 팀 마운드를 책임질 만한 재목으로 불렸던 그가 김시진과 똑같이 쓸쓸히 팀을 떠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001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김상엽은 몇 년간 야구를 잊고 살다가 2003년 영남대 코치를 거쳐 일본 오릭스에서 연수를 받은 후 얼마 전 NC 투수코치에 선임됐다. 10년 만에 프로 복귀다. 삼성에서 10년, 그리고 LG에서 2년. 프로에서 보낸 12년은 김 코치의 트레이드마크 파워커브처럼 힘껏 솟구쳤다가 가파르게 떨어졌다.

현역 시절에 대해 말을 꺼내자 김 코치는 “아쉽다”는 말을 먼저 했다. 그리고 “코치를 시작하며 투수가 어떻게 몸관리를 해야 하는지 깊이 파고들었다. 일본 연수에서도 로테이션, 트레이닝 분야를 많이 배우려 했다. 프로 2년차 때(1990년) 난 마무리 투수였다. 그 해 던진 이닝이 160.1이닝(44경기)이었다. 팀을 위해 어떻게든 많이 던지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던 때다. 매년 전력을 다하다 보니 한 해는 성적이 좋고, 그 다음해는 부상으로 재활을 하고 다시 잘 던지고. 나중에는 ‘격년제 투수’라는 비아냥거림도 들었다”고 말했다.

삼성 김상엽은 고졸 2년차에 12승 6패 18세이브 방어율 2.81을 기록하며 단숨에 삼성 에이스로 떠올랐다. 1992년에는 마무리 투수로 41경기에서 144이닝을 던져 8승 15세이브를 올렸다. 1993년에는 해태 선동열을 따돌리고 탈삼진 1위(170개)를 차지한다. 1995년에는 다시 선발로 17승(다승 2위) 방어율 2.30(4위)을 기록했다.

김상엽 코치. 스포츠동아DB


빼어난 활약으로 김상엽은 1996년 해태 선동열에 이어 한국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로 억대 연봉자가 된다. 포스트시즌에서도 강했다. 고졸 2년차 1990년 LG와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3회 구원등판해 9회 2사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1993년 해태와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 5이닝 무실점, 4차전에서는 선발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시속 150km대 초반을 찍었던 빠른 공, 최근 프로야구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130km대 중반의 빠른 커브, 그리고 담대함을 갖춘 투수. 이목구비가 뚜렷한 잘생긴 외모까지 더해져 김상엽은 당시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였다.

그러나 마운드에서 아낌없이 불태운 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상이 아니었다. 1991년 아킬레스건 부상을 시작으로 허리, 어깨, 팔꿈치까지 계속 탈이 났다. 그리고 한 해 잘하면 한 해 부진에 빠지는 ‘격년제’가 시작된다.

김 코치는 “요즘 마무리투수는 한 해 60이닝을 기록하면 많이 던졌다는 말을 듣는다. 마무리 투수로 150이닝 이상을 던지고 선발일 때도 필요할 때면 구원 등판을 했다. 시즌이 끝나면 손으로 공을 쥘 수 없을 정도로 팔이 아팠다. 지금 생각하면 재활에만 전념했어야 했는데 또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등판하다 부진한 기록이 나오고, 다음해 다시 이를 악물고 던지고, 다시 부상. 그렇게 몇 해 반복됐다. 얼마 후부터 자기 관리가 안 된다는 말이 나오더라”고 기억했다.

2000년 한국프로야구에 FA제도가 도입됐고 삼성은 김동수와 이강철을 영입해 포수와 투수의 동시 보강을 노린다. 그 대신 김상엽과 박충식이 보상선수로 LG와 해태로 팀을 옮긴다. 김상엽은 꿈에도 그리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다. 2000년 스프링캠프. LG 유니폼을 입은 김상엽은 다시 140km대 중반 빠른 공을 던지며 큰 기대를 받았지만 그해 여름 오른쪽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재활에 힘썼지만 다시 어깨가 말썽을 일으켰고 2001년 현역에서 은퇴한다. 서른둘의 젊은 나이. 그래서 더 아쉬움이 짙었다.

김 코치는 이후 2003년 영남대 코치를 맡을 때까지 야구를 잊으려 했다. “삼성을 떠날 때부터 아쉬움이 컸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할 수밖에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마음이 아팠다. 스스로 화도 많이 났고, 아쉬움이 커서 일부러 야구를 잊으려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를 돌이켜보니까 내 잘못이 더 많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는 1970년생이다. 꾸준히 잘 관리했다면 아직도 공을 던질 수 있는 나이다. 코치가 된 후 그 점을 선수들에게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코치는 NC유니폼을 입고 10년 만에 프로에 돌아왔다. 창원, 강진, 제주를 오가며 선수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다시 프로에 돌아와 영광스러울 뿐이다. 현역 때 두려움 없이 공을 던질 때도 있었고 부상으로 큰 고생을 할 때도 있었다. 우승하지 못한 한도 있다. 선수들에게 많은 것을 전하고 싶다. 빨리 우리 NC가 다른 8개 구단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함께 뛰고 또 뛰겠다.”

김상엽의 야구 인생은 힘차게 비상해 가파르게 떨어진 파워커브 같았다. 그리고 정상으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추락했던 에이스는 그 파워커브처럼 지도자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rushlkh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