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그들을 말한다] 넥센 홍원기 코치 “1·2·3루수…난 한경기서 다 해봤지”

입력 2011-12-2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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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센 홍원기 코치는 선수 시절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하는 ‘멀티 내야수’로 유명했다. 특히 두산 시절이던 2001년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하면서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단단히 뒷받침했다. 한화에서 트레이드됐던 설움을 씻는 순간이었다. 스포츠동아DB

10. 넥센 홍원기 코치


초중고 동기 박찬호와 중2때 포지션 바꿔
한화서 트레이드 후 독기…내야훈련 집중
2001년 두산의 마지막 KS우승 일등공신
“선수들의 눈높이 맞추는 지도자 되겠다”

두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은 2001년이다. 당시 두산은 페넌트레이스에서 단 한 명의 10승 투수도 배출하지 못했다. 페넌트레이스 성적은 3위. 객관적인 전력 면에서는 분명 1위 삼성과 2위 현대에 비해 열세였다. 그럼에도 두산이 가을 돌풍의 주역이 된 데에는 멀티내야수 홍원기(38·넥센 1군수비코치)의 공이 컸다. ‘코치, 그들을 말한다’ 10번째의 주인공은 ‘가을 사나이’ 홍원기 코치다.


● 신인시절부터 한화 주전 꿰찬 국가대표 출신 3루수

홍원기는 박찬호(38·한화)와 공주중동초∼공주중∼공주고 동기다. 어린시절 팀의 에이스는 박찬호가 아니라 그였다. 하지만 홍원기가 중2때 부상을 당하며, 둘의 운명은 엇갈린다. 그 때까지 3루수였던 박찬호와 주로 투수였던 홍원기가 서로 포지션을 바꾼 것이다. “지금도 그 때 나 안 다쳤으면 너 메이저리그 못 갔다고 농담을 던지곤 해요. 본인도 부정은 안하더라고요.(하하)” 이후 국가대표 3루수로 성장한 그는 1996년 한화 1차 지명으로 프로에 입성한다.

당시 한화 강병철 감독은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유명한 빙그레1세대를 대신할 자원을 찾고 있었다. 홍원기와 송지만(38·넥센) 등은 리빌딩의 기수였다. 특히 대형 내야수를 선호했던 강 감독은 홍원기를 3루수로 중용했다. 시즌성적은 타율 0.262, 9홈런 47타점. 신인으로서는 준수한 수치였다. 강 감독은 “신장(187cm)이 컸지만 몸이 상당히 부드러웠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견고한 수비를 했다”고 회상했다.

● 1루수·2루수·3루수·유격수, 내야수 그랜드슬램

데뷔 시즌 이후 잠시 주춤하던 그는 야구인생의 중대한 전기를 맞는다. 1999년 5월 한화는 전상열과 홍원기를 내주고, 두산 김경원을 받는데 합의했다. “트레이드 소식을 뉴스를 보다 알았어요. 이제는 서운한 감정이 없지만, 그 때는 눈물이 핑 돌았지요.” 홍원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적(敵)이 없는 야구인으로 꼽힌다. 둥글둥글하고 원만한 성격 때문에 어느 집단에서도 좋은 평판을 유지한다. 그러나 한화시절 “운동선수로서 너무 착하다”는 말 또한 들었다. 이런 그에게 트레이드는 ‘독기’를 품는 계기가 됐다.

당시 두산은 타이론 우즈, 김민호, 안경현, 김동주 등 화려한 내야진을 보유하고 있었다. 벤치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더라고요. 그 때까지 주로 3루수를 했지만, 2루수나 유격수 수비 훈련할 때도 슬쩍 가서 끼곤 했어요. 코칭스태프가 따로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제 살길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어느 새, 가방 속 글러브는 3개로 늘어났다. 당시 두산 사령탑이던 김인식(KBO규칙위원장) 감독도 주전 내야수들의 부상이 있을 때마다, 성실한 홍원기를 중용했다. 2000년에는 타이론 우즈의 부상으로 1루수 미트까지 끼었고, 2001년 4월6일 잠실 해태전에서는 1경기에서 3개의 포지션(1·2·3루)을 소화하기도 했다. 홍 코치는 “멀티내야수라는 꼬리표는 내 선수 생활의 가장 큰 자부심”이라며 웃었다.

홍 코치는 “멀티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는 게 내 선수생활의 가장 큰 자부심”이라고 말한다. 두산 유니폼을 입고 3루 수비에 여념이 없는 홍 코치의 현역 시절 모습. 스포츠동아DB




● 2001년 가을전설의 주인공


2001년 가을은 그의 선수생활에서 가장 화려했던 때다. 당시 두산은 유격수 김민호가 부상을 당해 전력의 공백이 예상됐다. 결국 유격수 자리는 홍원기의 차지였다. 포스트시즌의 첫 관문인 준플레이오프 상대는 공교롭게도 친정팀 한화였다. “제가 트레이드 되던 해(1999년) 한화가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어요. 그 때 마침 저희 집이 잠실야구장 근처였는데, 폭죽소리를 들으니 왜 그렇게 눈물이 흐르던지….”

하지만 2년 전의 아픔은 그의 집중력을 더 강하게 했다. 준PO 2경기에서 홍원기는 8타수4안타(1홈런) 타율 0.500 3타점을 기록했고, 시리즈 MVP까지 거머쥐었다. 2차전 종료 후 대전구장. 언론은 친정 팀에게 비수를 꽂은 그를 주목했다. 플래시 세례를 받는 홍원기에게 한화 홈 팬들도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지금도 그 때의 기쁨을 잊을 수가 없네요.” 이어진 현대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그의 활약은 계속됐다. 4경기에서 12타수 5안타(3홈런) 타율 0.417, 4타점을 기록한 것이다. 결국 두산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김인식 감독은 “홍원기가 한국시리즈행의 일등공신이었다. 일발장타력을 갖춘 장점까지 모두 발휘된 시리즈였다. 상상 그 이상의 활약이었다”고 평했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 우승의 순간에도 김 감독은 홍원기에게 1루를 맡겼다.

● 평발, 허리디스크, 빠르지 않은 발…. 극복의 과정을 통해 단단해지다!

홍원기는 평발인데다가,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심각한 허리디스크를 앓았다. 허리통증은 선수 생활 내내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 몸 관리는 더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탁월한 유연성은 훈련의 결과물이다. 코치가 된 지금도 그가 스트레칭 하는 모습을 보면, 후배 선수들은 감탄한다.

유격수나 2루수로서는 발도 빠른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약점을 타구예측능력을 향상시켜 보완해 나갔다. “두산에 트레이드 된 직후에는 벤치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 때 꼼꼼하게 우리 투수들과 상대 타자들의 습성들을 살폈지요.” 두산 시절 동료인 안경현 해설위원은 “내야수는 어려운 타구를 잡는 것보다 평범한 땅볼 처리를 실수하지 말아야하는데, 홍원기가 딱 그런 선수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현대(2006∼2007년)를 거쳐 은퇴하기까지, ‘극복의 과정’을 통해 단단해진 선수였다. 이는 지도자로서도 큰 장점이다. “박찬호 선수가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선수와 마주보기보다는, 어깨동무를 하고 한 곳을 바라보는 코치가 됐으면 좋겠다’고요. 제가 스타플레이어 출신이 아닌 만큼, 선수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 WHO 홍원기


▲ 생년월일 = 1973년 6월5일

▲ 출신교 = 공주중동초∼공주중∼공주고∼고려대

▲ 키·몸무게 = 187cm·92kg(우투우타)

▲ 프로 선수 경력 = 1996년 한화(1차 지명)∼1999년 두산∼2006년 현대(2007시즌 후 은퇴)

▲ 지도자 경력 = 2009∼현재 히어로즈 코치

▲ 수상 경력 = 2001년 준PO MVP

▲ 통산 성적 = 1043경기 타율 0.245, 48홈런, 284타점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setupma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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