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 Cafe]장진 “내 코미디의 힘은…하하, ‘자뻑’이죠”

입력 2012-02-1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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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은 감독, 연출가이기 전에 작가다. 한창 주목받던 20대 시절 매일 새벽마다 시 한 편을 썼다는 장진은 요즘도 시 같은 낙서를 트위터에 올린다. ‘르네상스맨’ 장진은 영화, 연극, 방송에 이어 뮤지컬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 @beanjju

■ 감독 연출 작가 방송인…본업이 궁금한 이 남자 ‘르네상스맨’ 장진

어떤 작품이든 ‘장진스럽게’
‘트랜스포머’로 마당극도 가능해요
내 안에서 계속 깨지며 완성되죠

장진의 진짜 직업이 뭐냐고요?
내 자신에게 묻는다면 작가!
영화감독이 직업이라면
계속 영화만 찍었겠죠, 하하


장진(41)은 누군가를 주눅들게 만들기 딱 좋은 사람이다.

특히 기자처럼 평범한 사람은 그의 이력만 봐도 한숨이 나올 정도다.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영화감독 외에 연극·방송연출, 방송진행자, 극작가, 심지어 배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직업 스펙트럼은 화려하다 못해 ‘이것이 과연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의심이 든다. 못하는 게 없고, 안하는 게 없는 대중문화계의 ‘르네상스맨’이다. 그는 지난해 영화감독으로 ‘로맨틱헤븐’을 연출했고, 오디션 프로그램 ‘코리아 갓 탤런트’ 심사위원을 맡았다.

얼마전에는 위성·케이블채널 tvN의 코미디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 코리아’의 대본과 연출에 출연까지 했다. 그러더니 요즘은 서울 대학로에 판을 벌였다. 자신이 대본을 쓰고 연출한 연극 ‘리턴 투 햄릿’과 ‘서툰 사람들’이 서울 동숭동 동숭아트센터에서 ‘동시상연’ 중이기 때문이다.

장진은 인터뷰 장소인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잠시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괜찮다면 요 옆 내 방에 가서 하자”고 이끌었다. 그가 대표로 있는 영화사 ‘필름있수다’ 사무실이 공연장 바로 옆에 있었다.

- 목이 잔뜩 쉬셨군요.


“기침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안 좋았는데, ‘서툰사람들’ 첫공(첫 공연) 때 무대 뒤에서 소리 지르는 사운드가 필요했어요. 그걸 또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가 그만 ….”


- 연습실에서 배우들에게 하도 소리를 질러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영화, 방송, 연극, 작가 등 정말 다양한 일을 하는데, ‘한 우물을 파라’는 말과는 한참 어긋난 것 같은데요.

“저한텐 다 하나인 거죠. 오히려 이 일을 하다가 무역업을 하면 그건 다른 걸 파는 거겠지만. 어릴 때부터 매체 전이, 통합에 대해 항상 열려있었어요. 10년 전에 이렇게 일했고, 지금도 이거 하잖아요. 이게 한 우물 아닙니까. 낚시로 치면 견지낚시도 하고, 대낚시도 하고, 릴도 하고. 전 그냥 낚시꾼인 거죠.”
장진은 지난해 12월부터 케이블채널 tvN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 코리아’(1월 21일 종영)에서 성역없는 풍자와 패러디, 강도높은 멘트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뉴스 코너인 ‘위크엔드 업데이트’에서는 아예 앵커로 직접 출연했다. 장진은 당시 방송에서 “조롱과 풍자는 다르다”, “공격할 때는 도망갈 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나를 조종하려들면 프로그램은 산으로 갈 것” 등의 어록(?)을 남겼다.

- 영화든 연극이든 정치풍자든 일단 장진의 손에 걸리면 ‘장진화(化)’가 되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장진스러움’은 ‘유쾌’와 ‘불쾌’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잘 탄다는 특징이 있는데 노하우가 있나요.

“물리적으로 시간을 투자해야죠. 예를 들어 제 연극 ‘리턴 투 햄릿’은 마당극으로 푼 ‘햄릿’입니다. 마당극요? 제가 마당극만 몇 편을 했는데요. ‘햄릿’이 아니라 ‘트랜스포머’도 전 마당극으로 만들 수 있어요. 노하우라 … 무조건 깨지면서 시행착오를 하는 거죠. 지금도 하고 있고.”


- ‘감독’ ‘연출가’ ‘대표’ 등 손으로 꼽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명함을 갖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잘라 ‘장진은 OO다’한다면 무엇일까요.

“내 안에서 ‘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작가죠. 영화감독은 직업이 아니거든요. 직업이면 계속해서 영화를 찍어야죠. 대한민국에 60세 넘은 감독은 임권택 감독님 한 분 뿐이잖아요. 우리나라는 감독이 되긴 쉬워도, 감독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장진은 감독, 연출가로 불리기 전 이미 작가였다. 서울예대 재학시절 문예창작과, 극작과가 아닌 연극과 학생으로 개교 이래 최초로 교내 문학상을 받았다. 졸업을 하자마자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천호동 구사거리’로 정식 등단했다. 대학시절 후배들이 장진 팬클럽을 결성할 정도로 인정받았다. 그가 대중과 처음 만난 것도 1994년 SBS ‘좋은 친구들’의 코미디 작가였다. ‘기막힌 사내들’로 영화감독 데뷔를 했을 때는 불과 스물일곱의 나이였다.

- 장진에게 영화나 연극은 ‘무엇’일까요.

“연극은 고향이고 원천이죠. 삶의 성숙기에 종교적 구원, 철학적 해결을 던져준 게 연극이니까. 영화는 좀 더 남성적 장르예요. 사회적 파장력, 진동이 크죠. 하지만 비슷하죠. 어차피 이야기를 만드는 거니까. 무대가 어울리면 연극, 필름이 어울리면 영화를 만드는 거죠.”
영화감독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할리우드 키드’가 아닌 ‘대학로 키드’라고 봐야 한다. 중3때 연극에 빠져 대학에 가기까지 무려 250여 편의 연극을 보러 다닌, 참 특이한 학생이었다.

“그렇죠. 대학로 키드. 1980년대에는 관극회원이란 게 있었어요. 극단마다 회원을 모집했죠. 관극회원은 프로그램 북을 사면 그냥 들어갈 수 있었죠. 집이 천호동이었는데 대학로, 신촌, 광화문, 종로, 이대 … 연극을 보기 위해 안 간 데가 없어요. 그것도 혼자서.”

- 연기자나 스태프들에게 장진은 어떤 감독, 연출가일까요.

“작품 딱 들어가는 순간 좀 엄격해집니다. 선후배를 떠나서. 감독이건 배우건 작품에 다 던져야 하니까요. 다만 그 시간이 끝나면 정말 편해져요.”


- 재떨이를 집어던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만.

“저도 어렸을 적 많이 던져봤죠. 영화 초창기 때는 아주 꼴통이었어요. 타 매체에서 왔다는 것 때문에 무시당하는 게 심했어요. ‘곤조’ 없었으면 버티기 힘들었지.”


- 이런 질문은 좀 그렇지만, 일부에서 ‘장진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 ‘까칠하기 그지없다’는 평도 없지 않더군요.

“어느덧 저도 중견이죠. 영화와 연극을 십 몇 년 했고, 제작에 각본까지 하면 삼십 편쯤 됩니다. 한 작품 잘 됐다고 어깨에 힘 들어가고, 안 됐다고 좌절하면, 이 판은 너무 후진 판이 되는 겁니다. 안 돼도 ‘내 능력부족이죠. 미안합니다. 이번엔 잘 해 볼게요’할 수 있어야 이게 직업이고 센 놈인 거죠. 누군가 이런 기질을 보면 ‘하아! 저놈의 잘난 뻑(잘난 척과 자뻑의 합성어인 듯)’하겠죠. 하하!”

■ 장진은?

● 1971년 서울 출생.
●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극작가. 문화창작집단 수다 대표.
● 서울예술대학 연극학과.
●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천호동 구사거리’로 당선해 등단. 영화 ‘기막힌 사내들’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 등 감독. ‘웰컴투 동막골’, ‘박수칠 때 떠나라’는 연극 이어 영화로도 만들어져 히트했다. 풍부한 상상력과 기발한 착상으로 대표되는 그의 코미디물은 ‘장진식 코미디’로 불린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ran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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