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소프트뱅크 호크스 26세 한국인 투수 김무영의 도전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상징물인 ‘매’ 앞에 선 투수 김무영이 야구공을 든 채 포즈를 취했다. 그는 야구 유학을 시모노세키에서 시작했지만 대학과 독립리그에서 뛴 팀은 모두 후쿠오카에 있었다. 김무영은 “후쿠오카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최강의 구단에서 필승 투수로 인정받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후쿠오카=이승건 기자 why@donga.com
○ 맞는 게 싫어 떠난 야구 유학
“정말 일본에 갈래? 고생 많이 할 텐데.”
“갑니다. 일본에서 야구 계속할 겁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까맣게 피멍이 맺힌 아들의 엉덩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던 것을 생각하면 잘된 일이었다.
아들은 “맞는 게 죽기보다 싫다”고 했다. 감독이나 코치가 때리는 것은 사랑의 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두 살 많은 선배들의 구타는 견딜 수 없었다. 대들기도 해 봤지만 돌아온 건 더 가혹한 매질이었다. 그래도 야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힘들게 뒷바라지해 온 부모님을 생각하면 포기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야구가 좋았다. 마침 초등학교 야구부 1년 선배가 먼저 일본으로 떠났다. 부모님끼리 잘 아는 사이라 자연스럽게 일본 유학 얘기가 나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테스트를 받았고 합격해 놓은 상태였다.
야구 명문 경남고에 진학하기로 했던 열다섯 살 소년은 다음 날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로 떠났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아들과 하루를 보낸 뒤 부산으로 돌아갔다. 무영은 하야토모고교 감독의 집에서 생활했다. 2000년 3월, 일본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던 때였다.
○ 후회의 연속… 미로를 헤매다
일본에서는 맞지 않고 야구를 해서 좋았다. 하지만 실력은 별로 늘지 않았다. 한국과 달리 모든 수업을 받아야 했기에 훈련시간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처럼 감독과 코치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포지션도 내야수 외야수 투수를 오갔다. 하야토모고 야구부는 강한 팀이 아니었다. 무영이 있는 3년 동안 내리 고시엔대회 지역 예선에서 탈락했다. 프로구단의 지명을 간절히 원했지만 그저 그런 학교의 평범한 선수를 데려갈 팀은 없었다. 야구 특기생으로 후쿠오카경제대에 진학했다. 부원이 160명이나 되지만 프로선수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팀이었다. 경남고에 진학했으면 한국 프로팀의 지명을 받지 않았을까. 후회가 됐다.
대학에서는 투수로만 뛰었다. 1학년 때 직구는 최고 시속 138km에 머물렀다. 아무리 세게 던져도 140km를 넘지 못했다. 1년만 더 해보고 야구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군 복무를 마칠 계획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행운이 찾아왔다.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 부산에서 헬스클럽에 다닌 게 반전의 계기가 됐다. 트레이너의 조언과 지도로 근육과 체중을 불렸다. 두 달 만에 63kg이던 몸무게가 76kg이 됐다. 늘어난 체중만큼 공은 빨라졌다. 2학년 첫 경기에서 시속 142km를 찍었고 이후 151km까지 던졌다. 3학년 때는 프로야구 스카우트들로부터 “졸업하면 우리가 뽑고 싶다”는 얘기도 들었다.
잔뜩 기대했지만 4학년 때 어깨를 다쳤다. 1년을 통째로 쉬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받아줄 프로팀은 없었다. 다시 기로에 섰다. 한국 프로팀의 테스트를 받아볼까 고민하다 관뒀다. 창피했다. 꼭 성공해서 돌아가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한 무영은 2008년 독립리그 팀인 후쿠오카 레드워블러에 입단했다. 직업야구선수였지만 월급은 100만 원이 채 안 됐다. 집세를 내고 나면 생활비는 빠듯했다. 부모님이 돈을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대학까지 졸업했는데 손을 벌리기는 싫었다. 그 대신 부쳐준 라면과 생필품은 거절하지 않았다. 삼각김밥 하나로 아침을 때웠고 경기 전 싸구려 우동을 먹었다. 좁아터진 집으로 돌아와 라면 두 개를 끓여 먹었다. 배는 불렀지만 마음은 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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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웠던 시절, 은인을 만나다
“그런 정신상태로는 프로선수가 될 수 없어.”
레드워블러 모리야마 료지 감독(49)은 불같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평소 온화한 성격의 감독이었기에 무영은 더 놀랐다. 1987년 프로팀 세이부에 입단해 이듬해 신인왕에 올랐던 투수 출신의 감독은 세이부 코치를 거쳐 잠시 고향의 독립리그 팀을 맡고 있었다.
감독의 호통에 무영은 정신을 차렸다. 부상을 핑계로 마지못해 야구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무영의 잠재력을 알고 있던 모리야마 감독은 집중적으로 조련을 했다. 어깨도 괜찮아졌고 9월부터 마운드에 꾸준히 올랐다. 35경기에 출전해 2승 무패 17세이브, 평균자책 0.41. 독립리그였지만 대단한 성적이었다.
“무영, 소프트뱅크!”
모리야마 감독이 활짝 웃으며 무영에게 말했다. 2008년 10월 신인 드래프트가 열린 날. 팀에서 마련해준 후쿠오카 외곽의 한 호텔에서였다. 무명 선수가 독립리그 활동 1년 만에 프로팀의 지명을 받은 것이다. 레드워블러에서는 그가 유일했다. 한국 야구 유학생으로 프로팀에 간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혹시나 해서 일본을 찾은 부모님은 아들을 끌어안고 좋아했다.
“가족은 나의 힘” 김무영은 배고팠던 독립리 그 시절에 오이케 마이(김마이·오른쪽) 씨를 만난 게 행운이라고 했다. 둘은 2009년 3월 혼인신고를 한 뒤 가정을 꾸렸고 큰아들 김하루토(가운데)를 얻은 뒤 2011년 4월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김무영은 “2009년에는 신인 시절이어서 결혼식을 올릴 상황이 아니었다. 아내 덕분에 야구를 계속할 힘을 얻었다. 이제는 가족에게 내가 보답할 차례”라고 말했다. 김무영 제공
“첫눈에 반했어요. 역시 결혼할 상대는 따로 있구나 싶었죠.” 무영이 회고했다. 오이케 씨가 무영에게 처음 던진 말은 “일본어를 못하는 줄 알았다”였다. 그녀는 배고픈 무영을 위해 음식을 사줬다. 계절이 바뀔 때면 옷도 장만해 줬다. 나중에 무영이 소프트뱅크에서 받은 계약금 3000만 엔을 부모님께 드린다고 할 때도 흔쾌히 동의했다. 무영은 2009년 3월 그녀와 혼인신고를 한 뒤 함께 살았다. 큰아들을 얻은 2011년 4월 결혼식을 올렸다.
○ “나는 한국인… 귀화 생각 안 해”
무영은 2009년 7월 17일 롯데를 상대로 1군 무대에 데뷔했다. 신인으로는 파격적인 승격이었다. 하지만 그해 1군 출전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대학 때 다친 어깨가 또 문제였다. 2군으로 강등됐고 2010년에도 그랬다. 2군에 있는 동안 무영은 꾸준한 재활로 부상을 털어냈다. 체계적인 훈련으로 공에는 더 힘이 붙었다. 올해는 입단 이후 처음으로 개막 엔트리에 포함됐다.
“빨리 귀화해서 편하게 야구해라.”
일본 팀에 입단해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자 무영의 일본인 친구들은 귀화를 권유했다. “한국 사람들이 너를 잘 모를 때 귀화해야 욕을 덜 먹지”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일본에서 태어난 두 아들은 당연히 일본 국적을 갖고 있다. 귀화 서류 한 통이면 매년 비자를 새로 받고 출입국 때 외국인으로 여권 심사를 받는 사소한 불편함도 사라진다.
“귀화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무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유를 덧붙였다.
“제가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는 꿈이 뭔지 아세요? 가슴에 ‘태극마크’ 한 번 달아보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어요. 귀화하면 그 꿈이 날아가는데 왜 귀화를 해요.”
지난해까지 무영이 마운드에 오르면 전광판에 ‘김(金)’이라는 한 글자만 떴다. 성만 명기하는 게 관례이기 때문이다. 올해부터는 다르다. 그가 마운드에 오르면 ‘김무영(金無英)’이 새겨진다. 그가 원해 바꾼 것이다.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김무영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뜰 때 얼마나 자랑스러운데요. 요즘 야구장에 배경음악으로 한국 그룹 노래도 많이 나와요. 그때마다 기분이 참 좋습니다.”
선망의 대상인 1군 선수이지만 무영은 아직 이기는 경기에 나가지 못한다. 흔히 말하는 패전처리 투수다. 올 시즌 목표는 앞서고 있는 경기 중간에 투입되는 것, 그 다음 목표는 그런 경기에서 마무리를 맡는 것. 그럼 그 다음은?
“한국에도 좋은 선수가 많은데 제가 지금 상태로 국가대표가 될 수는 없겠죠. 그래도 주전 마무리가 되면 기회가 오지 않을까요.”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최근 2년 연속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다. 이런 팀의 소방수라면 일본 최고의 투수라는 얘기다. 스물여섯 청년 김무영은 ‘후쿠오카의 매’가 되어 한국으로 날아올 수 있을까.
후쿠오카=이승건 기자 wh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