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일 “노시인에게 ‘은교’는 인생 돌아보는 장치”

입력 2012-04-23 07: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인생을 연기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서른다섯의 배우 박해일은 영화 ‘은교’에서 자신의 인생을 딱 두 번 더해야 하는 70대 노시인 이적요의 욕망과 애증을 제대로 연기해 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 @beanjjun

■ 박해일, 영화 ‘은교’서 70대 노인 변신

총 60회 촬영…매번 8시간 분장 투혼
70대 이적요 역 완벽소화 호평 줄이어

“정지우 감독 아니면 출연 안했을지도
경험하지 못한 노년…감정연기 심혈”


18일 서울 자양동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의 한 상영관. 영화 ‘은교’의 첫 시사회가 열린 이 곳의 한 켠에서 박해일은 조용히 눈가를 훔쳤다. 지난해 가을 모두를 ‘은교’ 속 자신의 집인 서울 부암동의 한 집에서 보낸 그는 당시 힘겨웠던, 이제는 추억이 된 기억을 떠올리며 슬며시 눈물을 흘렸다. “멍하면서도 뭔가 복잡한 느낌? 뭐…, 내 감정에 내가 취한 거죠. 하하!” 26일 개봉하는 ‘은교’(감독 정지우·제작 정지우필름, 공동제작 렛츠필름)는 박해일의 지난 가을 힘겨웠던 작업의 결실이다.

박범신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야기는 문단의 존경을 받는 70대 노시인과 그의 제자 그리고 열일곱살 소녀 은교의 미묘하면서 치명적인 삼각관계와 욕망을 그렸다.

박해일은 70대 노시인 역을 위해 촬영(60회차) 때마다 매번 7∼8시간을 꼼짝없이 앉아 특수 분장을 해야 했다. 머리는 실감나는 분장을 위해 이미 삭발을 했고, 스태프들은 쉽지 않은 역할에 도전한 그를 위해 녹음된 대사나 캐릭터에 어울릴 만한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박해일은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그냥 보내는 것과 같기도 했다”지만 “혼자 생각하는 순간도 많았다”고 말했다.

‘은교’의 모든 작업이 끝나고 이제는 개봉을 앞둔 시간. 박해일은 이미 보내버린 시간을 되돌이켰다.

“내가 연기한 70대 노시인 이적요는 자기 성찰이 굉장히 깊은 인물이었어요. 하지만 자신이 평생 고집하며 살아온 방식을 뒤흔들어놓는 은교(김고은)라는 존재가 다가왔죠. 은교는 어쩌면 이적요가 살아온 시간을 새롭게 일깨워준 것일 수도 있죠.”

그래서 은교는 이적요에게 “여자”일 수도,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장치”이거나 “상징일 수도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은교’에서 70대 노시인 이적요로 변신한 박해일.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 “연출이 정지우 감독 아니었다면 출연 심각히 고민했을 것”

박해일에게 ‘은교’라는 영화 역시 그런 듯하다. 그는 “아마 정지우 감독이 아니었다면 심각하게 (출연을)다시 한 번 고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감독과 내가 갖고 있는 부분을 서로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좀 더 소통할 수 있었다”는 그에게 ‘은교’는 “큰 숙제”처럼 다가왔다.

“감독과 김무열, 김고은 등 동료 배우들은 물론이고 스태프 등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작품이죠. 하지만 그들이 도와줄 수 없는 부분, 곧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감정이었어요.”

하지만 막상 영화의 뚜껑을 열고 박해일은 70대 노시인이 겪는 욕망과 애증과 인생의 황혼기가 가져다주는 헛헛한 삶을 제대로 연기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자신은 “(관객을)납득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카메라 앞에 나서기 전 자신감이었다. 박해일은 그 자신감을 온전히 스크린에 구현해내며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데 성공했다.

영화 초반부 살짝 자신의 ‘그것’을 드러내야 하는 순간에도, 박해일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70대 노인의 보잘 것 없는 육체, 자신의 그 노쇠한 몸을 바라보며 한 인생이 저물어가고 있음을 그저 무표정하게 받아들이는 극중 이적요의 현실을 그런 모습이 아니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그 기분이 영화를 끌고 가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지요.”

박해일은 자신의 방 유리창 밖으로 조그마한 태양광 패널을 붙여놓았다. 남향이 아닌 방의 이 태양광 패널은 하루 일정한 시간만 햇볕을 빨아들인다. 박해일은 거기에 연결해 휴대폰을 충전하는 등 소소한 일상의 재미를 맛보고 있다.

마치 햇볕을 말없이 받아들이는 태양광 패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박해일의 모습에서 연기와 작품에 관한 한 그렇게 머뭇거림 없이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표출해낼 줄 아는 배우가 바로 그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tadada11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