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역대 최고타자? 장효조·김종모 그리고 나!

입력 2012-09-2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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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은 한국야구 역사상 가장 멋진 타격폼을 가진 ‘전설’ 같은 타자다. 스포츠동아 인터뷰를 위해 잠실구장을 찾은 김용철이 미소를 짓고 있다. 잠실|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

76년 최강 한일은행에 스카우트
쟁쟁한 선배들 제치고 4번 꿰차
82년 올스타전 한경기서 3홈런
MVP는 놓쳐…두고두고 아쉬움

왼쪽도 소질 프로 첫 스위치히터
난 부드러운 스윙의 중거리 타자
선구안도 좋고 딱히 약점 없었다


프로야구 최초의 스위치타자였다. 프로야구의 전설로 남은 아름다운 스윙의 주인공. 친정팀은 2인자 대접만 했다. 1988년 선수회 파동 때문에 억지로 고향을 떠났다. 19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7차전 기적 때 롯데의 1루수 자리를 지켰다. 프로통산 11년간 131홈런, 555타점을 올렸다. 한창 때는 남자다운 매력이 넘치는 화장품 CF도 찍었다. “야구는 정정당당과 꼼수가 함께 필요한 운동이다. 내가 죽어야 우리 팀이 사는 희생타가 있어 매력이 있다. 프로야구를 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하고 싶은 것을 못해본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는 남자 김용철(55)이다.

○열아홉, 루키가 4번타자로!


1975년 부산상고 3학년 때 제29회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했다. 1년 후배 노상수, 이윤섭과 함께였다. 4번타자 3루수였다. 한일은행에 스카우트됐다. 첫 월급은 5000원, 감독은 김응룡. 부산상고 대선배는 루키에게 4번 자리를 줬다. 당시 한일은행은 국가대표의 산실이었다. 강문길, 강병철, 백기성, 우용득, 허구연 등이 있었다. 등번호 24번. 선수생활을 마칠 때까지 그 번호를 지켰다. “중거리 타자였다. 어떤 투수에게도 약점이 없었다. 힘을 빼고 부드럽게 쳤다. 선구안이 좋았다. 투수의 폼에 타이밍을 잘 맞췄다. 역대 최고의 타자 3명을 꼽으라고 하면 장효조(작고), 김종모, 그리고 나 아닐까?”


○스물다섯,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다!

경리단을 거쳐 한일은행에 복귀한 첫해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25세 때였다. 1982년 1월 롯데의 창단 멤버가 됐다. 계약금 1500만원, 연봉 1200만원. “프로야구의 창단 멤버가 됐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한일은행 마지막 해 월급이 38만원이었다.” 1986년 마산구장에서 진기록을 세웠다. 청보 김신부를 상대로 좌우타석에서 2루타를 날렸다. “그날 왼쪽 어깨가 아파 왼쪽 타석에서 치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이전부터 왼쪽으로도 쳐보고 싶었다. 나름대로 소질도 있었다.” 한국프로야구 첫 스위치타자의 탄생이다.


○올스타 MVP를 3번 놓친 남자

1982년 한국프로야구는 MBC 이종도의 만루홈런으로 시작해 OB 김유동의 만루홈런으로 끝났다. 여기에 빠진 것이 있다. 롯데 김용희의 올스타전 만루홈런. 3차례 벌어진 원년 올스타전에서 김용희는 3차전 때 만루홈런을 쳤다. 프로야구 최초의 올스타 최우수선수(MVP)가 됐다. 김용철은 아쉬웠다. 2차전에서 홈런 3개를 쳤지만 투표에서 밀렸다. 김용희는 1984년에도 김용철을 제치고 또 MVP가 됐다. “3차전으로 벌어졌다. 내가 한 경기에서 3안타를 치자 용희 형도 3안타를 쳤다. 1988년에는 올스타전 연장전에서 내가 결승 2루타를 치고 이겼는데도 진 팀의 홈런타자가 MVP였다. 그래서 3번 올스타 MVP를 놓쳤다.”

아쉬운 것은 더 있었다. 팀에서의 대우였다. 당시 롯데에선 경남고 출신 김용희가 야수 최고 대우를 받았다. 김용철이 더 뛰어난 성적을 올려도 변함이 없었다. 구단과의 갈등이 증폭된 때는 1984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타율 0.327, 21홈런, 67타점. 한국시리즈 우승도 차지했다. 1차 협상에서 김용철은 50%, 구단은 40% 인상을 주장했다. 2차 협상을 앞두고 한국야구위원회(KBO) 이사회에서 연봉 25% 상한선을 결의했다. “구단은 그때부터 25% 이상은 못 준다고 했다. 그 전에 계약을 마친 선수들은 상한선이 적용되지 않았다. 억울했다. 결국 다음해 무조건 25% 올려준다는 약속을 받았다.”

운명은 짓궂었다. 1985년 생애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타율 0.223, 7홈런, 36타점이었다. 잦은 부상 탓이었다. 연봉협상 때 지난해 약속을 상기시키며 25% 인상을 요구했다. 구단의 반응은 ‘무슨 헛소리냐’였다. “그때 배웠다. 구두약속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반드시 문서로 작성해야 했다. 구단과의 약속이어서 믿었지만 아니었다.”


○1988년 제1차 선수회 파동

롯데 주장을 맡고 있었다. 선수회를 만들자고 했다. 1988년 9월 30일 대전에서 만나기로 했다. 대의원 4명과 함께 참석했다. “아침부터 구단 직원이 집에 와서 버티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했다.” 대전 동학사 앞 식당에서 대의원회를 열었다. 롯데, MBC, OB와 빙그레 유승안이 모였다. 정족수 미달로 선수회 결성이 무산됐다. “그때 했던 투표용지 등 자료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구단에선 계속 탈퇴하라고 했다. 거부했다. 구단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12월 20일 이문한과 함께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삼성에선 장효조(작고)와 투수 장태수가 롯데로 갔다. “개인적으로는 삼성에 간 것이 좋았다. 그렇게 선수에게 잘해주는 팀은 처음이었다. 트레이드 첫 해 장효조보다 성적도 좋았다.”

1990년 김용철은 롯데, 해태와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롯데전에서 홈런 2개를 뽑아냈다. 해태전에선 선동열을 상대로 동점 홈런과 결승타를 쳤다. 삼성이 처음 해태와의 포스트시즌에서 이기는 순간이었다. 1992시즌을 마치고 은퇴했다. 발목이 아팠다. 그때부터 삼성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현대를 거쳐 고향에 돌아왔다. 당시 롯데는 최악의 시기였다. 2003년 백인천 감독을 대신해 감독대행을 맡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삼성 이승엽의 56홈런 도전 때 해프닝도 있었다. 3차례 기회에서 홈런을 못 친 이승엽의 마지막 타석에서 가득염에게 고의4구를 지시하자 홈 관중이 난동을 부렸다. 10월 2일 대구에서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는 이승엽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선 타이밍부터 맞추라”고 충고했다. 이승엽은 2회 이정민을 상대로 56홈런을 터트렸다.


○김용철이 기억하는 1984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최동원(작고)이 기막히게 던졌다. 우리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뿐이었는데 3차전을 이기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7차전 초반 최동원의 공이 나빴는데 3-4까지 따라가니까 볼이 달라졌다. 1루서 그 공을 보는데 소름이 돋았다. 내가 타임을 걸고 마운드에 올라갔다. ‘할 말이 없다. 좀 쉬면서 던져라’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경기가 끝난 순간 7차전 장면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분은 좋았지만 잠 좀 잤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나이트클럽에서 신나게 놀았다. 행사에 참가하고 선수들이 제일 먼저 단체로 빼빼로 CF를 찍었다. 나는 롯데 오렌지 주스 CF도 찍었다. 후반기 우승을 하고 받은 보너스는 선수 전원이 100만원씩 나눠가졌다. 한국시리즈 우승 보너스는 어떻게 나눴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김용철은?

▲생년월일=1957년 9월 21일(우투우타)
▲출신교=부산상고
▲프로선수 경력=1982년 롯데∼1989년 삼성(1992시즌 후 은퇴)
▲프로통산 성적=11시즌 1024경기 3415타수 968안타(타율 0.283) 131홈런 555타점
▲수상경력=골든글러브 2회(1984년 1루수·1988년 지명타자)


전문기자 marco@dobga.com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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