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영통신원의 네버엔딩스토리] 데이비드 오티스, 86년 묵은 밤비노의 저주 끝낸 ‘끝내기의 사나이’

입력 2013-06-1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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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턴 레드삭스 데이비드 오티스

마이너리그 생활 6년…미네소타서 FA 방출
2003년 보스턴 이적 후 주전 지명타자 꿰차
2004년 챔피언십 MVP 이어 WS 우승 일궈



2008년부터 손목부상·약물파동 등 시련도
끝내기홈런만 10차례…보스턴 구세주 부활
꼴찌 후보서 AL 동부 선두…그의 활약 덕분


1988년 월드시리즈를 앞두고는 앞선 내셔널리그(NL) 챔피언십시리즈에서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뉴욕 메츠를 힘겹게 따돌린 LA 다저스보다는 아메리칸리그(AL)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4경기 만에 제압한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일방적 우세를 점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10월 16일 1차전이 열린 다저스타디움에선 5만5000여 팬들이 홈팀을 일방적으로 응원했지만, 다저스는 9회말 투아웃까지 3-4로 뒤졌다. 마이크 데이비스가 어슬레틱스 마무리 데니스 에커슬리로부터 볼넷을 얻어 출루하자, 다저스타디움은 일순간 술렁이기 시작했다. 두 다리를 다쳐 벤치를 지키던 슬러거 커크 깁슨(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감독)을 토미 라소다 감독이 대타로 기용하는 승부수를 띄웠기 때문이다. 무관심 도루로 만들어진 2사 2루서 깁슨은 풀카운트 접전 끝에 에커슬리의 주무기인 백도어 슬라이더를 힘껏 걷어 올려 우측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홈런을 터뜨렸다.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오른 주먹을 불끈 쥔 채 어퍼컷 세리머니를 펼치며 다이아몬드를 돌던 깁슨의 모습은 25년이 흐른 지금도 많은 팬들의 기억에 생생하다. 깁슨의 끝내기홈런으로 상승세를 탄 다저스는 4승1패로 어슬레틱스를 물리치고 6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 오티스는 ‘끝내기의 사나이’

절체절명의 순간 승부의 추를 단숨에 바꿔놓는 끝내기홈런은 야구의 백미다. 7일(한국시간) 레드삭스의 홈구장 펜웨이파크에서도 짜릿한 끝내기홈런이 터졌다. 주인공은 ‘빅 파피’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데이비드 오티스. 3-3으로 맞선 9회말 레드삭스 선두타자 조니 곰스가 2루타를 치고 출루했다. 원정팀 텍사스 레인저스는 3번타자 더스틴 페드로이아를 고의4구로 걸렀다. 다음 타자 오티스의 발이 느린 점을 고려해 더블플레이를 노리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결의에 찬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선 오티스는 마이클 커크먼의 초구를 노려 쳐 우측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 3점홈런을 작렬시켰다. 2003년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은 이후 오티스의 10번째 끝내기홈런이자, 16번째 끝내기안타였다.


● 레드삭스에서 대기만성의 재능을 꽃피우다!

레드삭스 역사상 최고의 클러치히터라는 평가를 받는 오티스는 1975년 11월 18일 도미니카공화국 산토도밍고에서 태어났다. 193cm, 113kg의 거구인 오티스는 수비력이 떨어져 처음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6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1997년 9월 3일 메이저리그로 승격됐지만, 잦은 부상에 발목을 잡혔다. 1998년과 2001년에는 손목 부상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2002년에는 무릎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타율 0.272, 20홈런, 75타점으로 분전했지만 미네소타 트윈스와 재계약하지 못하고 FA(프리에이전트)가 됐다. 2003년 1월 레드삭스와 계약한 오티스는 시즌 개막 후 첫 두 달 동안 벤치워머 신세였다. 그래디 리틀 감독은 6월 3일 경기부터 제레미 지암비 대신 오티스를 주전 지명타자로 기용하기 시작했다. 오티스는 7월과 8월 19홈런을 펑펑 터뜨리며 기대에 부응했다. 128경기에서 타율 0.288, 31홈런, 101타점을 기록한 오티스는 AL 최우수선수(MVP) 투표에서 5위에 오르며 일약 스타 대열에 합류했다.



● ‘밤비노의 저주’를 푼 ‘빅 파피’

2004년은 오티스와 레드삭스 모두에게 매우 의미 있는 시즌이었다. 타율 0.301, 41홈런, 139타점을 올린 오티스는 생애 처음 올스타로 선정됐다. 포스트시즌에선 더욱 신들린 듯한 활약을 펼쳤다. AL 디비전시리즈에서 LA 에인절스 제로드 워시번을 상대로 끝내기홈런을 때렸다. 뉴욕 양키스와의 AL 챔피언십시리즈에선 4차전 끝내기홈런, 5차전 끝내기안타를 때려 MVP로 선정됐다. 사상 처음 지명타자가 리그 챔피언십시리즈 MVP를 거머쥐는 신기원을 열었다. 레드삭스는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경기 만에 물리치고 86년간 이어져온 ‘밤비노의 저주’에서 벗어나며 감격의 우승을 일궜다. 오티스는 1차전에서 4-2로 앞선 3회말 우측 담장을 넘기는 3점아치를 그렸다. 포스트시즌 5번째 홈런이었다. 오티스의 거침없는 상승세는 계속 이어졌다. 2005년 148타점(47홈런)으로 AL 타점왕을 차지했고, 2006년에는 54홈런으로 구단 신기록을 수립했다. 2007년에는 무릎과 어깨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타율 0.332, 35홈런, 117타점의 꾸준한 활약을 펼쳤고, 포스트시즌에서도 타율 0.370, 3홈런, 10타점으로 맹위를 떨쳤다. 시즌 막판 거센 돌풍을 일으킨 콜로라도 로키스를 4경기 만에 제압한 레드삭스는 3년 만에 다시 월드시리즈 정상에 섰다.


● 부상에 발목 잡힌 4년의 시련기

그러나 심각한 손목 부상을 입은 2008년부터 오티스의 성적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8년 타율 0.264, 23홈런, 89타점에 그쳐 레드삭스에 합류한 이후 최악의 성적을 냈다. 2009년에는 첫 34경기에서 타율 0.206, 1홈런, 30삼진에 그치며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무려 178타수 연속으로 홈런을 때리지 못하며 체면을 구겼지만, 후반기 들어 페이스를 회복해 28홈런과 99타점으로 이름값을 했다. 2010년 올스타전 홈런 더비에 출전해 결승에서 동향의 핸리 라미레스를 따돌리고 1위를 차지한 오티스는 32홈런 102타점을 기록했다. 3년 연속 2할대 타율로 부진했던 오티스는 2011년 타율 0.309, 29홈런, 96타점으로 인상적 활약을 펼쳤다. 이듬해에도 3할대 타율(0.318)을 유지하며 좋은 페이스를 유지했지만, 7월 17일 아킬레스건 부상을 입고 일찌감치 시즌을 접었다.


● 오점을 남긴 약물파동,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다!

역대 지명타자 중 최다 홈런과 타점의 주인공이지만, 오티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주홍글씨도 가슴에 남아있다. 메이저리그가 약물파동으로 술렁이던 2009년 2월 그는 “스테로이드 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보인 선수는 한 시즌을 아예 뛰지 못하도록 중징계를 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불과 5개월 뒤 그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처지가 됐다. 7월 30일 뉴욕타임스가 ‘2003년 약물복용 검사 결과 오티스와 당시 팀메이트였던 매니 라미레스 등이 양성반응을 보인 100명에 포함됐다’고 특종 보도한 것이다.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묵비권을 행사하던 그는 열흘 뒤 기자회견을 자청해 “건강보조제와 비타민을 먹었을 뿐인데 양성반응이 나온 것 같다”고 해명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제품을 복용했는지에 대해선 “기억나지 않는다”고 발뺌했다.

트윈스 시절 그다지 인상적 활약을 펼치지 못했던 오티스가 2003년 레드삭스로 이적하면서 전혀 다른 선수로 돌변했다는 사실은 금지약물의 영향일 공산이 크다. 그러나 몇 년간의 슬럼프를 이겨내고 최근 세 시즌 연속 3할대 타율과 함께 녹슬지 않은 파워를 과시하며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뛰어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당초 올 시즌 꼴찌 후보라던 레드삭스가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줄곧 선두를 달리고 있는 비결은 바로 ‘끝내기의 사나이’ 오티스의 활약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포츠동아 미국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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